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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 II

콜미리형제 2026. 3. 21. 19:37

 

보이지 않는 것

 

보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있게 한 무언가가 먼저 있었다는 뜻이다.

그 무언가는 움직였다. 움직였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것, 우리는 그것을 생명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생명은 본래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생명이 남긴 흔적일 뿐이다.

 

생명에는 두 종류가 있다.

스스로 존재하는 생명이 있고, 기대어 존재하는 생명이 있다.

스스로 존재하는 생명은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전에 없던 생명을 만들어낸다.

그 생명이 생각한다. 생각이 쌓이면 마음이 된다. 마음이 밖으로 나오면 말이 된다.

말은 생명이 움직인 자국이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의 말을 우리는 말씀이라 하고,

그분의 마음을 성령이라 하고,

그 생명 자체를 아버지라 부른다.

 

말씀이 성령으로 육신이 되셨다. 그분이 예수님이다. 아버지의 아들이시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이름이 아니라 역할이다아버지의 목적을 이루는 대속자, 말하자면 그분의 별명이다.

 

십자가 이후, 그분은 부활생명이 되셨다. 살리시는 영이 되셨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신 보혜사 성령으로, 주님의 형제들 곁에 계신다.

 

그분이 하시는 일은 이것이다.

 

각 사람의 심전(心殿)을 거처로 삼으시고, 거기서 대면하여 사신다.

보이지 않으시지만 함께 사신다.

소통은 생각으로 하신다. 마음 안에서 생각을 일으키시고, 그 생각을 통해 아버지를 알게 하신다.

 

이것이 사귐이다.

우리는 지금 이런 관계 안에 있다.

 

그런데 이 영생이 밖으로 나오려면 한 가지가 먼저 일어나야 한다.

 

자기 생명의 구조를 알려는 마음이다.

 

자기 안에서 충돌이 일어날 때왜 이러지? 하고 묻는 것.

그냥 "내가 문제야, 믿음이 없어서, 참을성이 없어서" 하고 덮어버리면 거기서 멈춘다.

"다 믿음으로 하는데 뭐가 문제야?" 하고 질문 자체를 닫아버려도 거기서 멈춘다.

 

영생은 질문하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은 단순하다.

"너는 나를 따르라."

 

어디까지? 아버지 앞까지.

 

거기까지 가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거기서 아버지를 만난다. 주님을 사랑하시는 그 생명을 만난다.

 

그 자리에서야 비로소 안다.

자기가 사랑이라고 부르던 것이 얼마나 좁고 무지한 것이었는지를.

 

그때 오래된 말씀이 새롭게 들린다.

 

"네 몸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평생 들어온 말씀이다. 수없이 되새긴 말씀이다.

그런데 그제야, 처음처럼 들린다.

 

그간의 사랑이 보인다.

얼마나 자신의 의지로 버텨온 것인지.

얼마나 헛것을 붙잡고 달려온 것인지.

 

그 자리에서처음으로 나를 사랑하게 된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먼저 나를 알아야 했다.

나를 알려면 먼저 아버지를 만나야 했다.

그 순서를 몰랐던 것이다. 아니, 알면서도 건너뛰려 했던 것이다.

 

사랑은 의지로 짜내는 것이 아니었다.

받은 생명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때 비로소 나를 사랑할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다.

 

날마다 내 의지로 나를 쳐 죽여야 하는 삶이 아니다.

광야에서 살아야 하는 생명이다.

거기서 진짜 생명을 만난다.

 

아우성이 얼마나 많겠는가.

혹자는 말한다. 불평하는 건 믿음이 없어서라고.

당해보지 않아서 그렇다.

 

십자가를 보라.

아버지는 예수님 안에 생명으로 계셨다.

죽어가시는 아들을 보시면서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셨다.

외면하신 게 아니다. 그 아픔과 함께, 끝까지 보고 계셨다.

 

그 지독한 사랑.

 

예수님께는 대속의 도구로 쓰셨지만,

지금 내게는 아들 되게 하시는 회초리다.

너무 가늘다. 그래서 더 아프다.

 

그런데 지나고 나면 안다.

그게 지독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막간말씀 안으로

여기서 잠깐, 말씀 두 곳을 들여다본다.

 

요한복음 14:26 — 보혜사, 생각나게 하심

 

ὁ παράκλητος... ἐκεῖνος ὑμᾶς διδάξει πάντα καὶ ὑπομνήσει ὑμᾶς πάντα

호 파라클레토스... 에케이노스 휘마스 디닥세이 판타 카이 휘포뮤네세이 휘마스 판타

"보혜사...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παρά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 보혜사. παρά(곁에) + κλητός(부름받은 자). 밖에서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안에 머무는 동반자다.

ὑπομνήσει (휘포뮤네세이) 생각나게 하시리라. ὑπό(아래에서) + μιμνήσκω(기억하다). 위에서 주입이 아니라 아래에서 밀어 올리는 것이다.

 

요한복음 15:26 — 진리의 성령, 증언하심

 

τὸ πνεῦμα τῆς ἀληθείας... ἐκεῖνος μαρτυρήσει περὶ ἐμοῦ

토 프뉴마 테스 알레떼이아스... 에케이노스 마르튀레세이 페리 에무

"진리의 성령... 그가 나를 증언하시리라"

 

ἀληθείας (알레떼이아스) 진리. ἀ(부정) + λήθη(망각, 숨겨진 것). 숨겨지지 않은 것, 덮인 것을 걷어낸 실재.

μαρτυρήσει (마르튀레세이) 증언하시리라. 법정 용어. 직접 보고 경험한 자만 할 수 있는 증언.

 

두 본문을 나란히 놓으면 이렇다.

14:26 — 성령은 안에서 밀어 올리신다 (ὑπομνήσει)

15:26 — 성령은 직접 보신 것을 증언하신다 (μαρτυρήσει)

 

태풍이 해저를 긁어 바닥의 것을 수면으로 올리듯성령은 이미 안에 있는 것을 건드려 떠오르게 하신다. 그리고 올라온 것 중에서 아버지로부터 온 것을 증언하신다. 나머지는 걷어내신다.

 

그것이 광야다. 그것이 요동이다. 그것이 아픔이다.

 

한 가지를 바로잡아야 한다.

 

사유하고, 묵상하고, 관찰및 통찰하는 행위가 성령 침입의 조건인 게 아니다.

성령은 이미 살아가는 현장 전체에서 일하고 계셨다.

다만 우리가 너무 다급한 나머지지나쳤을 뿐이다.

 

그렇다면 현장에서는 성령의 인도가 없는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현장이 성령의 일하심이 가장 먼저 현상되는 자리다.

 

다만 그 자리에서 잠깐이 필요하다.

심호흡 하나. 육신의 생명을 진정시키는 그 순간.

잠잠히 지켜보는 것. 생각을 잠깐 다듬는 것.

 

트리밍(trimming)하는 순간이다.

 

?

나는 아들이니까.

 

그리고 그 순간생각이 내 생각 안으로 침입한다.

내가 떠올린 게 아니다. 불쑥 들어온 것이다.

 

보이지 않는 사랑을 알게 하시는 보혜사 성령이 그렇게 일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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