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 품까지
요한의 네 시퀀스 설명
서두
살다 보면 사건이 온다.
크고 작은 사건들.
기쁜 것도 있고, 고통스러운 것도 있다.
이해되는 것도 있고,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런데 돌아보면 보이는 것이 있다.
그 사건들이 우연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알게 하시려고 일으키신 것들이었다.
그리고 앞의 사건이 다음 사건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퀀스였다.
요한도 그랬다.
에베소 20년이 요한복음을 준비했다.
요한복음 10년이 서신서를 준비했다.
서신서가 밧모섬을 견디게 했다.
밧모섬이 계시록을 낳았다.
우연이 하나도 없었다.
모든 사건이 하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버지 품까지.
이 글은 그 시퀀스를 따라간다.
요한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자신이 걸어온 길이 보인다.
그리고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다음 사건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프롤로그 — 설명이 필요했던 이유
당나귀가 흔들렸다.
예루살렘을 등진 지 사흘째,
로마군사로의 돌길 위에서 요한은 말이 없었다.
바울은 로마에서 죽었다. 베드로도 갔다.
예루살렘은 곧 불탈 것이었다.
떠나야 했다.
마리아가 먼저 당나귀에 올랐다.
예수님의 어머니. 살아있는 증인.
요한은 그 뒤를 따랐다.
길은 몸을 말하게 한다.
노인에게 당나귀 위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됨이다.
흔들릴 때마다 무언가가 올라온다.
태풍이 바다 바닥의 것을 위로 올리듯이,
고단함은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낸다.
요한은 글을 쓰려고 작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살아가다 보니 써야 할 것들이 드러났다.
주님이 내주하시는 그 깊은 곳에서
영적 태풍이 바닥에 있는 것을 위로 올렸다.
요한은 그것을 어쩌할 수가 없었다.
붙잡아 두려 해도 붙잡아 둘 수 없는 것들이었다.
요한과 마리아는 쉬어가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말이 없어도 되는 사이였다.
말을 해야 할 때는 진짜 말만 했을 것이다.
살아있음이 진지하게 느껴지는 노정이었다.
기억이 올라왔다.
서른 해 전쯤,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였다.
57년에서 58년 사이의 일이었다.
예루살렘 교회는 여전히 모세의 율법에 열심인 자들이었다.
스데반이 피를 흘린 지 이십 년이 넘었는데도.
심령이 변한 것이 없었다. 그들은 그것을 자랑했다.
바울은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성전에서 정결 의식을 치렀다.
자비로. 율법에 따라.
그리고 거기서 잡혔다.
잡혀서 부당한 대우를 받자 바울은 말했다.
"나는 로마 시민이다."
요한은 그 장면을 잊지 못했다. 지금도 의아했다.
복음을 전하다 죽을 각오를 한 사람이
로마 시민권으로 자신을 보호했다.
바울은 분명히 생명으로 산 사람이었다.
그의 글 곳곳에서 그것이 보인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생명 안에 있었다.
그러나 그 생명이 에클레시아 안에 넓어지지 않았다.
바울의 말씀은 전해졌지만,
바울이 산 생명의 결은 전해지기 어려웠다.
가르침은 전달되어도, 삶은 함께 살아야 전달되기 때문이다.
안디옥에 닿았을 때 형제자매들이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여독을 풀며 교제가 이어졌다.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이 땅에서 처음 복음을 전했던 곳이었다.
그 열매들이 여기 있었다.
요한은 들었다.
젊은 시절의 요한은 우뢰 같은 사람이었다.
예수님이 그렇게 부르셨다.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귀가 열려 있었다.
형제자매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으며 요한은 느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충분히 전해져 있었다.
주님에 관한 논리 있는 지식은 풍성했다.
신앙의 분별력도 돋보였다.
그런데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거듭난 생명의 흔적이 눈에 띄지 않았다.
주님과의 관계는 질문에서 드러난다.
주님이 만드신 세상에 처음 태어난 아이는
낯설어서 자꾸 묻는다. 알고 싶어서.
어린아이는 질문을 잘한다.
그런데 이곳에는 질문이 없었다.
전통과 관습, 문화, 들은 이야기로 가르치고 권면하는 풍토가 있었다.
새 생명이 살아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 생명은 육신의 생명력에 억압받는 형편이었다.
노예생활이 그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자유를 향한 해방을 선물 받았건만
그 자유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주님께로 가는 길목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있었다.
요한은 문득 한 장면이 떠올랐다.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손을 뻗었을 때.
주님은 말씀하셨다.
"붙잡지 마라."
아버지께 가야 하는 주님이셨다.
마리아의 손이 그 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복음도 그렇다.
주님께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어야 한다.
길목에서 붙잡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었다.
천국에 가고 못 가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여기서, 생명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을 전해야 했다.
에베소까지 아직 길이 남아 있었다.
당나귀가 다시 흔들렸다.
요한은 고삐를 고쳐 쥐었다.
써야 할 것들이 마음속에서 정리되고 있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과, 형제자매들과 어떻게 사귀는지.
그분의 나라로 가는 여정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이들에게.
아버지 품까지.
지금 그 첫 장을 연다.
시퀀스 1 — 요한복음 20장까지, 예수 그리스도 설명: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20년이 지났다.
요한은 에베소 형제자매들의 얼굴을 알았다.
조석으로 변하는 마음을 알았다.
기쁠 때와 무너질 때를 알았다.
회개할 때와 완고해질 때를 알았다.
멀리서 소식을 듣고 편지를 쓰는 것과
함께 밥을 먹으며 그 얼굴을 보는 것은 다르다.
바울은 에베소를 사랑했다.
그러나 바울은 편지를 썼다.
요한은 그들과 함께 살았다.
그 20년이 지나고 나서야
요한은 붓을 들었다.
무엇부터 써야 하는가.
바울의 복음은 이미 여기 있었다.
십자가. 부활. 믿음으로 얻는 의.
그것은 진리였다. 흔들릴 수 없는 진리였다.
그런데 요한의 손은 전혀 다른 곳을 향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헬라인들도 로고스를 알았다.
우주를 관통하는 이성. 만물의 원리. 질서.
철학자들은 그것을 머리로 이해했다.
지식이었다. 개념이었다.
요한이 말하는 로고스는 그것이 아니었다.
태초는 시간의 시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첫째 안이다.
시간이 생기기 전, 영원 안에
이미 살아계신 분이다.
개벽이다.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철학이 아니다. 지식이 아니다.
살아계신 생명이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셨는가를 전했다.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믿음으로 어떻게 의롭다 함을 얻는가.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실재였다.
요한은 그 사건 너머를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영원부터 아버지 안에 계신 분.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분.
생명 그 자체이신 분.
존재였다.
지식으로 아는 하나님은 가르치기 쉽다.
개념을 전하면 되니까.
그러나 야다 — 하나님을 알아가는 관계 안에서의 회개는 다르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빛처럼 비출 때,
거울 앞에 서듯이 자신의 어떠함이 보이는 것이다.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다.
만나야 된다.
요한이 20년을 함께 산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개념을 전하러 간 게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같이 살면서 보여주러 간 것이었다.
요한은 붓을 들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었다.
생명을 전하는 것이었다.
영원부터 살아계신 그분을
지금 여기서 만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설명이었다.
요한이 써야 했던 이유였다.
시퀀스 2 — 요한 1, 2, 3서, 사귐 설명: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복음을 쓰고 나서도
요한은 에베소를 떠나지 않았다.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았다.
그 복음으로 살았다.
10년이 흘렀다.
살아가면서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가르침으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함께 살면서 드러났다.
글을 써야 했다.
작정한 것이 아니었다.
살다 보니 또 올라오는 것들이었다.
세 편의 편지였다.
영지주의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럴듯한 자들이었다.
지식이 있어 보였다.
깊은 것을 아는 것처럼 말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을 부정했다.
그리스도는 영이시니 육신을 입으실 수 없다고 했다.
고난도 없었고, 십자가도 없었다고 했다.
요한은 첫 줄부터 그것을 잘랐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손으로 만졌다.
예수님의 살이 있었다.
피가 있었다.
눈물이 있었다.
육신으로 오신 것이 핵심이었다.
그것을 부정하면 십자가가 없어진다.
십자가가 없으면 사랑이 없어진다.
사랑이 없으면 생명이 없어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거짓 영을 분별하는 기준은 이것 하나였다.
그러나 요한이 서신서에서
가장 많이 쓴 단어는 분별이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것이 전부였다.
이것이 핵심이었다.
이것이 사귐의 근거였다.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었다.
사랑은 우리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에게서 흘러온 것이었다.
사귐이었다.
요한이 말하는 사귐은
모임이 아니었다.
행사가 아니었다.
예배 형식이 아니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수직이 먼저였다.
아버지와의 사귐.
아들과의 사귐.
그런데 이 수직은 세상의 수직과 달랐다.
세상의 수직은 위가 아래를 밟는다.
하나님 나라의 수직은 반대다.
서로 밑으로 내려가 섬기려 한다.
맨 아래에 주님이 계신다.
누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할 때마다
주님께 밀려난다.
아무도 그 자리를 꿰찰 수 없다.
주님이 그 자리에 계시기 때문에
섬김이 흘러나온다.
다름을 수용할 수 있다.
각자 다른 모양으로 섬길 수 있다.
수평은 이 수직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수직 없이 수평만 있으면
그것은 사귐이 아니라 친목이었다.
빛 안에서 걷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느니라."
여기서 어둠은 죄가 아니다.
창조 때부터 어둠은 있었다.
하나님이 어둠을 나쁘다 하지 않으셨다.
어둠은 앞으로 순기능으로 드러나야 할 것들이었다.
문제는 어둠이 아니었다.
주님을 몰라서
자신 안에 이미 주신 순기능을
왜곡해 드러내는 것이 문제였다.
빛을 봐야 어둠을 안다.
빛이 비출 때
무엇이 왜곡되어 있는지 보인다.
하나님은 우리가 역기능을 보일 때
벌하시기 전에 먼저 이렇게 하신다.
저가 나를 몰라서 그래. 알게 해야지.
사건으로 드러내신다.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사물과의 관계 안에서.
현상들이 충돌하는 그 자리에서
순기능이 드러나도록 이끄신다.
빛 안에서 걷는다는 것은
그 사건들 안에서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그 걸음의 열매였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안에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영혼이 잘되는 것이 먼저였다.
범사가 잘되는 것은 그 다음이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자신이 함부로 여기는 것은 모순이었다.
새 생명을 받은 자는 그 생명을 귀히 여겨야 했다.
자신 안에 계신 그분을 귀히 여기는 것이었다.
우상을 멀리하는 것이었다.
요한은 서신서의 마지막을 이렇게 닫았다.
"자녀들아, 우상을 멀리하라."
갑작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사귐의 설명서 전체가 이 한 마디를 향해 가고 있었다.
우상은 형상이 아니었다.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지식이 우상이 될 수 있었다.
제도가 우상이 될 수 있었다.
사람이 우상이 될 수 있었다.
심지어 로고스에 관한 말씀이 우상이 될 수 있었다.
살아계신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이 그 자리를 채우는 순간
그것이 우상이었다.
영생이었다.
요한은 이것을 위해 서신서를 썼다.
은혜를 받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은혜에 머무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은혜 주신 그분을 만나야 했다.
생명이신 그분을 만나야 했다.
아버지를 만나야 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는 것이었다.
야다였다.
지식이 아니었다.
만남이었다. 관계였다.
살아계신 그분을 직접 만나는 것이었다.
은혜가 문이었다.
영생은 그 문 안에서
아버지 생명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것이 사귐이었다.
그것이 요한이 전하려 한 것이었다.
시퀀스 3 — 요한계시록, 새예루살렘 설명: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에베소에서의 10년이 더 지났다.
요한복음을 쓴 후에도 요한은 그 복음으로 살았다.
서신서를 쓰면서도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았다.
아침마다 얼굴을 보며.
저녁마다 같은 밥을 먹으며.
그러나 무언가가 여전히 무거웠다.
로고스가 그들 안에 계셨다.
성령이 내주하고 계셨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몰랐다.
아니, 알았다. 머리로는 알았다.
그러나 심전을 거니시는 발걸음 소리를
귀로 듣지 못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다.
에덴에 하나님이 계셨다.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낯선 것이 아니었다.
매일 들려오던 소리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은 그 소리에 숨었다.
지식이 들어온 날이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망.
지식이 관계를 막았다.
에베소도 그랬다.
바울의 복음이 지식이 되어있었다.
살아계신 로고스께서
그들의 심전을 거니고 계셨는데
그 발걸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칙령이 내려왔다.
황제를 신으로 섬기지 않는 자. 체포하라.
요한은 노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유가 되지 않았다.
에베소에서 끌려갔다.
밧모섬.
에게해의 작은 바위섬.
형제자매들이 해안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탄광이 있었다.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 돌을 캤다.
쇠사슬 소리와 함께.
광야였다.
예수님도 광야에 가셨다.
침례를 받으신 후,
성령에 이끌려 사십 일을 광야에서 지내셨다.
광야는 끝이 아니었다.
언제나 통과하는 곳이었다.
요한은 그것을 알았다.
몸은 탄광에 있었지만
마음은 다른 곳을 향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주님이 부활 후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
요한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 말씀이 지금 다시 들려왔다.
주님의 날이었다.
탄광의 어둠 속에서
요한은 성령에 이끌렸다.
갑자기.
전혀 다른 세계가 열렸다.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
요한은 몸을 돌렸다.
일곱 금 촛대.
그 사이를 거니시는 분.
거니시는 분이었다.
에덴을 거니시던 그분.
에베소 형제자매들의 심전을 거니시던 그분.
지금 탄광의 어둠 속에서도 거니시는 그분.
요한은 엎드렸다. 죽은 자처럼.
그분이 오른손을 얹으셨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였다.
주님은 각 교회를 알고 계셨다.
멀리서 보신 것이 아니었다.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며 보셨다.
심전 안에서 보셨다.
에베소 교회.
수고와 인내가 있었다. 거짓 사도를 분별했다.
지식은 있었다. 열심도 있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버렸다.
잃은 것이 아니었다. 버린 것이었다.
새 생명으로 사는 것은 불편했다.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가야 했다.
내가 계획할 수 없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런데 로고스를 지식으로 가지면 달랐다.
내가 다룰 수 있었다.
내가 가르칠 수 있었다.
내가 권위를 가질 수 있었다.
살아계신 로고스를 만나는 것보다
로고스에 관한 지식을 가지는 것이
훨씬 편하고, 안전하고, 보기 좋았다.
내가 말씀을 다루는 것이었다.
기가 막힌 권력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 사랑을 버린 자리에서 자란 것이었다.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리라."
이기는 자에게는 약속이 있었다.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리라."
생명나무였다. 에덴에서 잃어버린 것.
그것을 다시 주시겠다는 것이었다.
서머나 교회.
환란이 있었다. 가난이 있었다.
유대인들의 비방이 있었다.
핍박이 곧 올 것이었다.
주님은 그것을 다 아셨다.
"죽도록 충성하라.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었다.
탄광보다 더 어두운 곳에서도
생명은 꺼지지 않는다는 약속이었다.
버가모 교회.
사탄의 위가 있는 곳이었다.
거짓 교훈이 들어와 있었다.
발람의 교훈. 니골라 당의 교훈.
외부의 환란이 아니었다. 내부의 부패였다.
"회개하라."
이기는 자에게는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겠다 하셨다.
그 돌에 새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받는 자밖에는 알 수 없다 하셨다.
지식으로 아는 이름이 아니었다.
관계 안에서만 알 수 있는 이름이었다.
두아디라 교회.
이세벨이 있었다. 스스로 선지자라 하는 여자.
거짓 선지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다.
권력이 짐승 구조로 제도화되어 있었다.
그 제도 위에 올라탄 자가 있었다.
하나님의 사자인 양 교태를 부렸다.
하나님께로 향해야 할 영광을 가로챘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남은 자들이 있었다.
이세벨의 교훈을 받지 않은 자들.
제도가 아니라 주님을 붙든 자들이었다.
"너희가 가진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고난 속에서 굳게 잡은 자들이었다.
화려한 자들이 아니었다. 남은 자들이었다.
사데 교회.
살았다 하는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죽었다.
형식은 있었다. 이름은 있었다. 생명이 없었다.
그러나 사데에도 남은 자들이 있었다.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어."
몇 명이었다. 많지 않았다. 그러나 있었다.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을 것이었다.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을 것이었다.
빌라델비아 교회.
적은 능력이 있었다.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말씀을 지켰다.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
"내가 네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나도 너를 지키리라."
이기는 자는 새예루살렘 성전의 기둥이 될 것이었다.
적은 능력으로 말씀을 붙든 자들이었다.
화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겼다.
라오디게아 교회.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았다. 미지근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자만이었다.
자기 자신이 적이었다.
주님은 문 밖에 서셨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자에게는 주님과 함께 보좌에 앉는 것을 허락하시겠다 하셨다.
자만을 이겨낸 자였다.
문을 열고 들어오게 한 자였다.
일곱 교회였다.
고난이 있었다. 환란이 있었다.
거짓 선지자가 있었다. 자기 자만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 남은 자들이 있었다.
이기는 자들이 있었다.
주님은 그들을 알고 계셨다.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며.
심전 안을 거니시며.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리고 요한은 보았다.
하늘 문이 열렸다.
사탄이 무저갱에 갇히는 것을 보았다.
짐승과 음녀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제국의 화려함이 하루아침에 연기가 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백마 탄 이.
충신과 진실.
그 눈은 불꽃 같고.
"왕의 왕이요, 주의 주."
부활이었다.
탄광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제국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신랑이 오셨다.
신부가 단장하고 기다렸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요한의 눈에서 무언가가 흘렀다.
탄광의 먼지와 섞였다.
새예루살렘이 내려왔다.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같이.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아버지의 언약이었다.
에덴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여기서 완성되었다.
함께 사시려는 하나님.
내 안에 거처를 삼으시려는 하나님.
생명이신 하나님.
탄광의 어둠 속에서
노인 요한이 본 것은
우주의 마지막 장면이 아니었다.
지금 여기서 생명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였다.
경계였다. 소망이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탄광의 어둠은 그대로였다.
쇠사슬 소리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요한은 알았다.
생명이 피어나고 있었다.
지금 이 어둠 속에서.
이미.
시퀀스 4 — 요한복음 21장, 다시 시작 설명: 너는 나를 따르라
요한이 죽었다.
마지막까지 에베소에 있었다.
형제자매들이 그를 들것에 메고 다니며 교제했다 한다.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한다.
"형제들아, 서로 사랑하라."
그리고 갔다.
멘붕이었다.
남겨진 자들이 있었다.
요한의 제자들이었다.
요한복음을 함께 썼고,
서신서를 전달했고,
계시록을 받아 적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요한이 죽지 않을 줄 알았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살아있을 줄 알았다.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그런데 죽었다.
길을 잃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돌아보았다.
70년이었다.
예루살렘이 불탄 후부터 요한이 죽기까지.
초대 교회가 살아온 70년이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던 자들이 있었다.
성령이 임하시던 그 날을 기억하는 자들이 있었다.
바울의 복음으로 세워진 에클레시아들이 있었다.
요한의 글로 생명을 만난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를 지나친 것이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과 사귐의 관계에 진입했었다.
공생애 3년 동안 함께 먹고,
함께 걷고,
함께 울었다.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삶으로 알았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은
그 사귐의 관계 진입을
복음으로만 전했다.
생명을 받았다.
그런데 그 생명이 가야 할 곳까지
가지 않았다.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 집을 지었다.
거듭난 생명은
생명 주신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 한다.
그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은혜는 집이 아니었다.
문이었다.
주님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하셨는가.
부활 후 예루살렘이 아니었다.
갈릴리였다.
상실한 제자들이 있는 그 자리로 오셨다.
디베랴 바다로 오셨다.
지금도 같으셨다.
멘붕 상태에 있는 그 자리로 오신다.
길을 잃은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신다.
베드로가 말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디베랴 바다였다.
공생애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주님이 부활 전에 이미 약속하셨던 자리였다.
"갈릴리에서 만나자."
부활생명으로 태어나
주님의 형제가 된 자들이
처음으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시작하는 자리였다.
새 술이었다.
새 부대가 필요했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했다.
새 생명이 살아있다는 체감이 필요했다.
주님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알게 하셨다.
그물. 153마리. 숯불. 조반.
앞으로는 보이지 않더라도
이와 같이 알게 하시는 섬김은 계속될 것이었다.
주님이 아버지께 가셔서 보이지 않는 것.
그것이 '의'였다.
옳음이었다.
그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날이 새어갈 때
해변에 서신 분이 있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없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던졌다.
그물을 들 수 없었다.
"주님이시라."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숯불이 있었다.
생선이 놓여있었다. 떡도 있었다.
주님이 차려놓으셨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조반을 먹은 후 주님이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세 번이었다.
세 번 물으셨다.
베드로는 세 번 대답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르라."
너는.
복수가 아니었다.
단수였다.
일대일이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던 그 밤처럼.
아무도 대신 싸워줄 수 없었다.
야곱 혼자였다.
하나님과 야곱 단둘이었다.
밤새도록이었다.
지극히 인격적이었다.
"너는 나를 따르라."
함께 있지만 따르는 것은 각자였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밤새 매달렸듯이.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었다.
옆에 있는 형제의 걸음이
내 걸음이 될 수 없었다.
자신이 직접 그분을 붙들어야 했다.
야다였다.
각자 자신만의 야다가 있었다.
주님과의 씨름 안에서
각자 다르게 알아가는 것이 있었다.
그 야다는 다른 형제가 모른다.
말로 전달되지 않는다.
삶으로 살아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클레시아 안에서
각자의 야다를 나눌 때
다른 무언가가 일어났다.
내가 만난 하나님과
네가 만난 하나님이
같은 분이심이 드러났다.
그 다름이 하나로 엮이며
하나님 나라가 드러났다.
에클레시아는 그것이었다.
각자의 야다를 공유하며
하나님 나라를 함께 정복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품이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어디까지인가.
아버지 품까지였다.
주님이 가신 곳까지였다.
그곳은 어떤 곳인가.
우리를 수용하는 곳이다.
온 우주를 수용하고도 넘치는 곳이다.
각자의 야다를 다 품고도 남는 곳이다.
그 품 안에서 생명은 영원하다.
영원하다는 것은
끝이 없다는 것만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살아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지금도 살아계신다.
지금도 거니시고 계신다.
지금도 부르고 계신다.
"너는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21장은 여기서 닫힌다.
요한이 쓴 것이 아니었다.
요한 곁에 있던 '이 사람'이 썼다.
그리고 에클레시아가 그 내용을 추인했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한 사람의 야다를
에클레시아가 함께 확인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것은 모든 에클레시아가 쓴 글이다.
아버지 품까지 — 요한의 네 권의 설명
시퀀스 1 — 요한복음 20장까지 · 예수 그리스도 설명: 누구를 따르는가.
시퀀스 2 — 요한 1, 2, 3서 · 사귐 설명: 어떻게 따르는가.
시퀀스 3 — 요한계시록 · 새예루살렘 설명: 어디를 향해 따르는가.
시퀀스 4 — 요한복음 21장 · 다시 시작 설명: 지금 여기서 다시.
요한과 그 에클레시아를 통해 주님이 쓰신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설명서를 펼친 당신에게
같은 말씀이 들린다.
"너는 나를 따르라."
아버지 품까지.
생명이신 그분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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