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십자가에서 해 보자.
보이는 예수님.
죽어가시는 예수님.
절규하시는 예수님.
하나님이라면서
거기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대속이라고 한다.
죄 때문이라고 한다.
무슨 죄인가?
쓸데없는 짓 아닌가?
그게 왜 필요한가?
믿음으로 보자.
우리의 죄,
내 죄가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야 할 정도로
그렇게 극악한 것인가?
주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죄가
그렇게 어마어마한 것인가?
그렇다면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믿으면
하나님이 내 인생을 잘 돌봐 주셔서
앞으로 아무 일도 없게 되는 것인가?
그런데 왜
나는 믿어도 안 되는가?
영으로 보자.
처절하다.
저렇게 죽어가는
예수님의 생명은
지금 누가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생명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저 죽음을 보고 계신 것인가?
참 모질다.
모지시다.
주님은 또 어떠한가?
그 눈빛,
어머니를 대하시는 그 태도는 무엇인가.
모질다.
차갑다.
저렇게 냉정할 수 있는 것인가?
정을 떼시는 것인가,
아니면 사랑하시는 것인가?
모진 것도 사랑인가?
그런 사랑도 있는 것인가?
아버지와 아들이
어쩌면 그렇게 닮아 보이는가.
주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또 어떠한가.
아니,
나를 보시는 그 눈빛은.
처절한 사랑.
애간장이 녹아내리는
속의 애림.
애림도 사랑인가?
피가 마른다.
주님의 피도 말라가지만
그 장면을 보는 마음은
피를 끓게 한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왜 나는
하나님을 모질게 보고 있는가.
나는 더 모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던 날
나는 어쩔 수 없이
엄마의 눈을 감겨야 했다.
못된 놈이었다.
이제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주님께 가시라고
냉정해져야 했다.
그게 믿음이었나?
아니면
가스라이팅이었나?
그 후에도
내 생명의 고비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나는
생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장해
주님께 감사를 드렸다.
마치
가인처럼.
나는
가인이었다.
지금은 안다.
나는 짐승이었고
나는 음녀였다.
나는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
이익을 도모하던 자였다.
그것도
주님 안에서.
왜 그런가?
사건이 말한다.
사건은
역기능을 말하고
순기능을 말한다.
사건은
하나님의 마음을 설명하는
설명서다.
성경의 이야기들이
그렇게 말하듯이.
예를 들면
창세기의 이야기처럼.
이 이야기를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주님의 형제들에게 말해 보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들에게
이상한 놈이 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다시
십자가에서 시작해 보려 한다.
모든 이야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