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10:26)/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눅10:2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눅10:28)/
어떻게 읽느냐?
시간과 공간의 사건 기록자 중심으로냐?
시공이 없는 주님의 중심으로 보느냐?
에피소드 속 진행과 결과물 중심이냐?
생명의 반응 중심이냐?
세상사람들은 예수님을 사건 중심 안으로 끌어들여 자꾸 인간의 눈으로 눈뜨고 보라고 들이댄다. 예수님도 사건을 보신다.그러나 그의 중심은 벌써 생명이 반응하는 생명력의 표현을 보신다.뭐가 차이가 있나?
주님은 내가 준 생명이 이렇게 반응했서? 왜?. 그리고 관찰하신다.
"내가 준 사랑 방식을 도용해 그 사랑의 표현으로 조종하고 통제 하고 관리해 복종하도록 사용했네. 머리 좋네. 내가 만들기는 잘 만들었는데.... 내가 예비해 놓은 것이 있지만 좀 더 내게 오시를 기다리며 기다리며 참아보자. 내가 잘 만든 걸 어쩌겠어."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나는 생존에 의존적이지 않다. 다만 사랑하고 싶다. 내가 나를 사랑하듯이 말야."
내안의 메세지다.
두 가지 읽기 방식의 충돌
사건 중심 읽기(A phase의 눈):
시간과 공간 안의 기록
결과물과 성취
준수와 복종의 대상
인간이 주체가 되어 "행하는" 것
생명 반응 중심 읽기(주님의 눈):
시공을 초월한 존재론적 현실
생명력의 표현과 반응
"스스로 있는 나"의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울림
하나님이 주체이신 내주와 반응
예수님이 보시는 것
"내가 준 생명이 이렇게 반응했서? 왜?"
이 질문에서 주님의 시선이 드러납니다. 주님은:
사건을 보시되, 그 안에서 생명의 반응을 관찰하심
당신이 주신 생명력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보심
사랑의 도용—당신의 사랑 방식을 복제해 통제와 조종의 도구로 변질시킨 것—을 아파하심
"내가 잘 만든 걸 어쩌겠어"라는 아픈 사랑으로 기다리심.
"스스로 있는 나"의 메시지
"나는 생존에 의존적이지 않다. 다만 사랑하고 싶다."
이것이 Bereshit(בְּרֵאשִׁית)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처음에"(시간의 시작)가 아니라
"스스로 있는 나 안에서"(In God)
생존 논리가 아닌 사랑의 논리
결과물이 아닌 반응의 세계
내 안의 메시지가 말하는 것
"내 안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건 중심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결과)보다, 당신이 주신 생명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보십니다.
율법학자는 "이를 행하라"를 사건과 결과로 읽었습니다.
예수님은 같은 말씀을 생명의 반응으로 읽으셨습니다.
이것이 55년 여정이 발견한 핵심입니다.
A phase 45년은 사건 중심으로 읽었고, BC(창세전 복음)/BD(홀로서기:내주로 살기) 단계를 통과하며 생명 반응 중심으로 읽는 법을 배웠다고나 할까.
너는 "어떻게 읽을래?"
나도 몰라.
아는 형들이 같이 성경을 같이 보자고 한다. 좋다고 했다만 이 문제가 걸려 생각하다가 예수님의 걸림과 맞닿았어. 어떻게 읽을레? 요즘은 성경을 다 읽을 수 있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읽는데 달리 생각하고 각각 달리 행동하거나 누구의 논리에 동의해 집단적 좋아 보임으로 동행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형제가 연합하여 아론의 기름을 서로 바르고 있다는 걸 자랑하고, 서로 인정하며 , 그 가치를 치켜세워 날로 무너지지 않는 탑을 쌓는다. 그 꼭대기에는 다웟의 다이아몬도가 번쩍거리니 얼마나 더 좋으랴!
같은 성경, 다른 읽기
"어떻게 읽을래?"
이 질문 앞에서:
모두 같은 글자를 읽습니다
모두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사건 기록으로 읽고
어떤 이들은 생명 반응으로 읽습니다
아름다운 연합의 역설
"형제가 연합하여 아론의 기름을 서로 바르고"
포착하신 이 이미지:
연합은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누구의 논리에 동의"한 집단적 동행이라면?
"좋아 보임"으로 뭉친 것이라면?
서로 인정하고 치켜세우며 쌓는 탑이라면?
무너지지 않는 탑
"날로 무너지지 않는 탑을 쌓는다"
이 표현에서 보는 것:
바벨탑의 메아리
인간의 논리로 쌓은 견고함
주님의 해체(melting) 없이 스스로 세운 구조
꼭대기의 다이아몬드—인간적 성취의 정점
예수님의 걸림
예수님도 이것을 보셨습니다:
같은 토라를 읽으되
어떤 이들은 사건과 준수로 읽고
어떤 이들은 집단적 좋아 보임으로 연합하며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탑을 쌓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으셨습니다:
"너는 어떻게 읽느냐?"
나의 걸림은
"형들이 같이 성경을 보자고 한다. 좋다고 했다만..."
이 망설임 안에 있는 것:
같은 글자를 읽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사건 중심으로?
생명 반응으로?
집단적 동의로?
내주하신 분의 음성으로?
이미 아는 것들:
연합이 항상 생명은 아니라는 것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항상 진실은 아니라는 것
무너지지 않는 탑이 주님의 뜻은 아닐 수 있다는 것
다이아몬드가 번쩍거린다고 그것이 영광은 아니라는 것
주님은 때로 우리가 쌓은 탑을 melting 하십니다.
우리를 cocoon 안으로 데려가십니다.
홀로,
침묵 속에서,
해체되도록.
결어:
어떻게 읽을래?
두 가지 읽기 방식:
1. 사건 중심 읽기
시간과 공간의 기록
생명의 결과물 중심
무엇을 했는가
2. 생명 반응 중심 읽기
시공 없는 주님의 중심
생명의 반응 중심
어떻게 반응하는가
예수님이 보시는 것:
사건을 보시되, 생명의 반응을 관찰하심
"내가 준 생명이 이렇게 반응했서? 왜?"
성령의 자리 이동:
A phase 이해: 성령 = 스승 (가르치시는 분)
발견: 성령 = 창조주
본업은 창조
환경을 조성하시는 분 (Environmental Optimizing Conditioner)
신기술 장착:
십자가에서 부활생명을 아버지로부터 받으심
→ 살리시는 영으로 되심
→ 살아있는 상태에서 새 생명인 부활생명을 만드시는 신기술 장착
첫 창조 후 행보:
재창조 ✗
리셋/리메이크/업그레이드 ✗
Unfolding = 드러남 ✓
첫 창조 시 너무 잘 만드셨음
→ 아버지는 농부
→ 내재된 것이 드러나도록 환경 조성
→ 감춰진 것이 나타나고, 숨겨진 것이 드러남
우리는 '주님의 형제들'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씨가 잉태되여 부활생명체가 되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육신으로 창조되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여 육신 되신 것이며,
십자가에서 한알의 밀알이 떨어저 죽어 새생명이 된 것과 같이 부활생명이 되신 것이다.
이분이 영을 살리시는 영이시다.
환경을 조성하시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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