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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에베소 이주 생활기

콜미리형제 2026. 2. 22. 13:40

 

한의 에베소 이주 생활기

생명을 살아보니


 

프롤로그 : 걸어서 가는 길

 
67년, 예루살렘.
 
성벽 너머로 전쟁의 기운이 짙어지던 날, 요한은 마리아의 손을 잡았다. 노인의 손이었다. 가늘고 차가웠다. 그런데 그 손을 잡는 순간 요한은 서른 년 전 요단강가를 떠올렸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고, 음성이 들리던 그날.
 
바울이 로마에서 목 베임을 당했다는 소식이 왔다. 베드로도 그해 거꾸러진 십자가에서 갔다. 두 기둥이 한 해 안에 사라졌다. 침례 요한이 죽은 후 주님이 갈릴리로 가 본격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셨듯이 — 이제 요한이 움직여야 할 때였다. 예루살렘은 이미 전쟁의 냄새가 짙었다. 유대-로마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성전이 무너지기 전에 나가야 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마리아도 알았다. 침례 요한에게서 전해 들었거나, 아니면 — 아들의 눈빛이 그날 이후 달라졌다는 것을 어미는 그냥 알았을 것이다.
 
요한은 혼자가 아니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하셨을 때 — 그것은 요한 한 사람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 주님을 따르던 이들 전체가 그 말씀을 들었다. 갈릴리에서부터 함께 걸어온 여인들, 예루살렘에서 함께 모였던 형제들, 요한 곁에서 가르침을 받아온 제자 몇이 이미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고 있었다. 그들이 함께 떠났다.
 
짐을 지는 사람이 있었다. 마리아의 걸음을 옆에서 부축하는 사람이 있었다. 길을 아는 사람이 앞에 섰다. 작은 무리였지만 — 함께였다.
 
첫 번째 고민은 길이었다.
 
해로였다. 가이사랴 항구에서 배를 타면 에게해를 건너 에베소까지 직접 닿을 수 있었다. 빠르고 단순했다. 육로로 가면 갈릴리를 지나 수리아 안디옥을 거쳐 타우루스 산맥을 넘고 소아시아 내륙을 관통해야 했다. 몇 달이 걸릴 여정이었다.
 
요한은 오래 생각했다. 혼자라면 해로를 택했을 것이다. 빠르고 깔끔했다. 그런데 이 일행은 달랐다. 가이사랴 항구는 지금 전쟁 중 로마 군수물자가 오가는 혼돈의 항구였다. 배를 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고, 구했다 해도 이 인원을 싣고 지중해의 계절 바람을 견뎌야 했다. 마리아의 몸으로 그 파도를 버틸 수 있을지 — 요한은 마리아의 손을 다시 보았다. 가늘고 차가운 손이었다.
 
그런데 육로에는 다른 무게가 있었다. 길을 가다 보면 공동체들을 만나게 된다. 갈릴리의 형제들, 안디옥의 에클레시아, 소아시아 내륙 곳곳의 모임들. 그들은 요한 일행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으면 나올 것이었다. 붙잡을 것이었다. 묻고 또 물을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어떻게 됐느냐. 성전이 정말 돌 하나도 남지 않았느냐.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요한은 그 질문들이 두렵지 않았다. 다만 — 지금 자신에게 그 질문들에 답할 것이 있는지가 불확실했다. 예루살렘을 떠나는 이 발걸음이 무엇인지, 에베소로 가는 것이 맞는 것인지,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빈손으로 형제들 앞에 서는 것이 요한에게는 해로의 파도보다 더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말했다.
 
“걸어서 가자. 그 아이도 걸어서 다녔다.”
 
요한은 그 말에서 결정이 났다. 신학적 논거가 아니었다. 어미의 한 마디였다. 그 아이도 걸어서 다녔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유대 광야에서 사마리아까지 — 주님은 언제나 걸으셨다. 그 발걸음 안에서 사람들을 만나셨다. 길 위가 사역이었다.
 
그리고 — 솔직하게 말하면 — 요한 자신도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빈손인 채로 형제들을 만나는 것이 두렵기도 했지만 — 그 만남 없이 에베소에 도착하는 것이 더 두려웠다. 길 위에서 무언가가 채워져야 했다. 무엇이 채워질지는 몰랐다. 그러나 걷다 보면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요한은 갈릴리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 솔직하게 말하면 — 요한 자신도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은 단순한 이사가 아니었다. 성전의 시대가 끝나는 것이었다. 그것을 발바닥으로 느끼면서 가야 했다.
 
일행은 북쪽으로 걸었다. 갈릴리를 지나 수리아 안디옥을 향해. 로마의 군용도로는 잘 닦여 있었지만 타우루스 산맥의 바람은 매서웠다. 마리아의 걸음은 느렸다. 요한은 그 속도에 맞추었다.
 
걸으면서 그들은 이야기했다.
 
마리아가 기억하는 예수님과, 요한이 기억하는 예수님이 — 그 길 위에서 천천히 겹쳐졌다.
 
마리아는 베들레헴을 알았다. 목자들의 냄새, 동방에서 온 낯선 손님들, 헤롯을 피해 달아나던 밤의 공기. 요한은 갈릴리를 알았다. 요단강의 물소리, 광야에서 돌아오신 주님의 눈빛,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이 기대셨던 그 어깨의 온기.
 
두 기억이 합쳐지자 — 한 사람의 생애가 완성되었다.
 
요한은 걸으면서 알았다. 자신이 나중에 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이것은 논증이 아니었다. 기억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의 중심에는 언제나 — 생명이 있었다.


1 : 안디옥에서

 
안디옥은 컸다.
 
바울과 바나바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던 그 도시. 에클레시아는 이미 수십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요한 일행이 도착했을 때 공동체는 따뜻하게 맞았다.
 
그런데 요한은 첫날 저녁 코이노니아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틀린 것이 없었다. 바울의 언어로 가득했다. 칭의, 속죄, 율법으로부터의 해방, 그리스도의 보혈. 정교하고 치밀했다.
 
그런데 악보는 완벽한데 음악이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마리아는 코이노니아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끝나고 요한이 물었다.
 
"어떠셨습니까."
 
마리아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들 이야기를 하는데 — 아들이 없었다."
 
요한은 그 말을 오래 들고 있었다.
 
마리아는 신학을 몰랐다. 헬라 철학도 몰랐다. 그런데 어미는 알았다. 자기 아들의 냄새가 거기 없다는 것을.
 
안디옥에 머무는 몇 주 동안 요한은 조용히 공동체를 살폈다. 사람들은 선했다. 진지했다. 바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구원은 언제나 과거였다. 해결된 사건. 선언된 지위. 그리고 그 지위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반복.
 
생명은 현재 진행형인데 — 그들의 신앙은 과거 완료형이었다.
 
율법은 본질적으로 과거의 기준으로 현재를 판단하는 구조다. 바울이 그토록 씨름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 바울의 해법이 다시 과거 완료형이 되어버렸다.
 
요한은 마리아에게 말했다.
 
"에베소까지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
 
 


2 : 마리아의 마지막 길

 
안디옥을 떠나 소아시아로 접어들었을 때, 마리아의 걸음이 더 느려졌다.
 
요한은 서두르지 않았다. 어떤 날은 마을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어떤 날은 길가 돌 위에 앉아 마리아가 숨을 고르는 동안 한참을 기다렸다.
 
그 기다리는 시간에 마리아는 이야기를 했다.
 
요한이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었다. 나사렛에서의 유년 시절. 목수 요셉과 함께 보낸 평범한 나날들. 예수님이 처음으로 회당에서 두루마리를 펼쳐 읽던 날.
 
"그날 사람들이 다 그를 주목하였다. 나도 주목하였다. 내 아들인데 — 낯설었다."
 
요한이 물었다.
 
"무엇이 낯설었습니까."
 
마리아가 하늘을 보았다.
 
"그가 읽을 때 — 글자가 살아있었다. 율법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요한은 그 말을 가슴에 새겼다.
 
또 다른 날 마리아가 말했다.
 
"가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되던 날, 나는 그에게 말했다. 포도주가 없다고. 그가 나를 바라보더니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하인들에게 말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왜 그리 하셨습니까. 때가 아니라 하셨는데."
 
마리아가 웃었다. 주름이 깊었다.
 
"어미는 안다. 말과 다르게 마음이 이미 움직였을 때를."
 
소아시아의 어느 이름 없는 산자락, 마리아의 숨소리가 가늘어졌다. 요한은 그녀의 여윈 손을 잡았다.
 
마리아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요한아... 너는 내 아들의 말씀을 적으려 하겠지. 하지만 기억해라. 그 아이는 글자로 살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빵을 찾았고, 먼지 앉은 발을 씻길 때 물의 차가움에 몸을 떨기도 했다."
 
그녀는 품 안에서 낡은 천 조각 하나를 꺼내 요한의 손에 쥐여주었다. 솔기 없이 통으로 짠, 주님이 입으셨던 겉옷의 귀퉁이였다.
 
"사람들은 그가 하늘에서 내려온 신령한 존재라고만 말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에게 젖을 먹였고, 그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요한아, 하나님이 인간의 살 냄새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을 잊지 마라. 그것이 내가 아는 가장 큰 신비다."
 
요한은 그 천 조각에서 나사렛의 흙먼지 냄새와 어머니의 눈물 냄새,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생명의 온기를 느꼈다.
 
마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요한은 오래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서 무언가가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부탁하신 것을 다 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길이 시작되는 것도 알았다.
 
그를 묻고 일어서며 요한은 중얼거렸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제야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된 긴 여행이 끝났고, 동시에 새로운 기록의 서막이 올랐다.
 
 


3 : 에베소의 교회들

 
에베소는 들끓고 있었다.
 
항구 도시의 광장 저편으로 아르테미스 신전이 솟아 있었다. 세계 칠대 불가사의 중 하나. 거대한 석조 기둥들이 하늘을 찌르며 도시 전체를 압도했다. 단단하고, 완벽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거대한 신전의 그늘 아래, 가정마다 작은 에클레시아들이 모여 있었다. 요한은 그 대비를 보며 오래 생각했다.
 
돌로 만든 신의 집과,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임.
 
바울이 뿌린 씨앗들이 이미 수십 년을 자라 거목이 되어 있었다. 교회마다 바울의 언어가 넘쳤다. 칭의, 속죄, 율법으로부터의 해방, 그리스도의 보혈. 헬라의 철학자들이 에클레시아로 들어오면서 신학은 더욱 정교해졌다. 논증은 치밀해졌다. 개념은 벽돌처럼 쌓였다.
 
쌓일수록 단단해지고, 단단해질수록 — 흐르지 않았다.
 
어느새 아르테미스 신전을 닮아가고 있었다.
 
요한이 에베소에 머문 지 몇 해가 지나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의 코이노니아 방식은 달랐다. 바울의 제자들이 로마서를 펼쳐 논증을 전개할 때, 요한은 그냥 이야기를 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주님이 불을 피워 생선을 구워주시던 새벽 이야기. 마리아가 들려준 가나의 포도주 이야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시던 그 눈빛 이야기.
 
어느 날 원로 장로 알렉산드로스가 요한을 찾아왔다. 바울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었다. 은발에 깊은 눈주름,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무거웠다.
 
"선생님, 바울 사도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법정에서의 확정된 선언 아닙니까? 그런데 왜 선생님은 자꾸 부족하다는 뉘앙스로 말씀하십니까?"
 
요한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알렉산드로스, 당신의 말대로 그 선언은 위대하오. 채무자가 빚을 탕감받은 것은 기쁜 일이지. 하지만 묻겠소.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그 길로 채권자의 집을 나와 다시는 그를 보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코이노니아겠소?"
 
"그것은... 법적으로 자유인이 되었다는 뜻 아닙니까?"
 
"그것은 상태의 변화일 뿐 존재의 흐름은 아니오. 바울은 율법이라는 감옥의 문을 부수고 우리를 끌어냈소. 하지만 당신들은 그 부서진 문턱에 주저앉아 '나는 이제 자유다'라고 복창만 하고 있소."
 
알렉산드로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면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요한의 눈빛은 비난이 아니라 안타까움으로 젖어 있었다.
 
"당신들의 구원은 영수증 같소. 받아두고 서랍에 넣어두는 것. 하지만 내가 본 구원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였소. 가지가 줄기에게 '나는 법적으로 접붙여졌는가'를 매일 확인하느라 진액을 빨아올리지 못한다면, 그 가지에 열매가 맺히겠소?"
 
알렉산드로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죄는 율법의 조항을 어긴 것 이전에,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킨 고립 그 자체요. 그러니 구원 또한 법정의 판결문이 아니라, 끊어졌던 생명의 소스가 다시 연결되어 실시간으로 흘러 들어오는 사건이어야 하오. 업그레이드된 죄인이 되지 마시오. 매 순간 새로 컴파일되는 생명이 되시오."
 
 


4 : 쓰기 시작하다

 
밤이었다.
 
에베소의 등불 아래 요한은 양피지를 펼쳤다. 오래 생각했다. 무엇을 써야 하는가.
 
바울의 언어를 교정하는 신학서를 쓸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논쟁의 짐승을 만들 뿐이다. 변증을 쓸 것인가. 아니다.
 
그는 결국 — 기억을 썼다.
 
처음부터 있었던 것.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던 것. 마리아에게 들은 것. 요단강에서 직접 목격한 것.
 
품 안에서 그 낡은 천 조각을 꺼냈다. 마리아가 쥐여준 것. 나사렛의 흙먼지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
 
단순한 철학적 로고스가 아니었다. 이것은 마리아의 품 안에서 숨 쉬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바 된 생명의 말씀이어야 했다.
 
요한의 손이 움직였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이 한 문장을 쓰고 요한은 멈추었다.
 
바울이라면 이 자리에서 아담의 죄를 먼저 불러왔을 것이다. 죄의 기원, 율법의 요구, 심판의 필연성. 그런데 요한의 손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죄가 아니라 생명이 먼저였다. 처음부터. 아담 이전에. 율법 이전에. 심판 이전에.
 
요한은 계속 썼다. 가나의 포도주를. 니고데모와의 밤 대화를. 사마리아 여인을. 나사로를.
 
그것들은 신학적 예증이 아니었다. 생명이 실제로 작동하는 장면들이었다.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 원점에서 새로 컴파일되는 순간들이었다.
 
그런데 요한은 혼자 쓴 것이 아니었다.
 
에베소에 요한이 온 것이 67년경이었다. 그때부터 15년이 넘었다. 요한은 그 공동체와 함께 살았다. 바울의 언어로 골수가 된 사람들과, 먹고, 걷고, 울고, 기도하고, 논쟁하면서 살았다. 요한이 말한 것들 — 포도나무, 생명의 떡, 내 안에 거하라, 아버지와 내가 하나다 — 이것들은 어느 날 갑자기 쓰인 신학이 아니었다. 15년의 살아있는 대화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처음에는 저항이 있었다. 바울에게서 직접 배운 사람들은 요한의 언어가 낯설었다. 바울은 구조를 주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해 죄와 율법과 심판과 은혜의 논리적 흐름. 그 구조 위에 삶이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요한은 구조 이전의 것을 말했다. 태초에 있던 것. 논증이 아니라 임재. 해결이 아니라 거함.
 
그러나 살다 보면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바울의 칭의가 없으면 불안했다. 그런데 바울의 칭의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도 있었다. 요한이 말하는 것 — 상호내주, 아버지 안에 내가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 이것은 바울이 말한 것의 토핑이 아니었다. 다른 차원이었다. 바울이 문을 열었다면, 요한은 그 안에서 숨 쉬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15년이 지나자 공동체 안에 무언가가 바뀌었다. 바울의 언어로 들어왔으나 요한의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설명을 잘 못했다. 로마서를 논증하듯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 안에서 무언가가 흘렀다. 자유였다. 율법의 항목을 넘어선 자유. 판단 없이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 두려움 없이 기도하는 것, 실패해도 다시 하나님 앞으로 걸어 나오는 것.
 
그 사람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가 살아온 것을 적어주십시오. 우리가 죽으면 이것이 사라집니다. 우리 다음 세대는 어디서 이것을 얻겠습니까.”
 
요한은 오래 침묵했다. 적는 것이 두려웠다. 살아있는 것을 문자로 고정하면 — 그것이 다시 설명서가 될 수 있었다. 바울의 로마서가 그렇게 되었듯이. 사람들은 로마서를 읽고 논쟁하고 체계를 세웠다. 그런데 바울이 목숨 걸고 살아낸 것은 그 논증의 배후에 있었다.
 
그래서 요한은 결론을 냈다. 논증을 쓰지 않겠다. 사건을 쓰겠다. 생명이 실제로 작동했던 장면들을. 설명이 아니라 현장을. 독자가 그 현장 안으로 들어와서 스스로 몸으로 느끼도록.
 
수영을 가르치는 것은 수영 이론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물속에 같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의 복음서는 처음부터 다르게 시작했다. 아담의 죄가 아니라 — 태초의 생명으로. 율법의 문제가 아니라 — 로고스의 임재로. 독자를 문제의 현장이 아니라 생명의 현장으로 데려갔다.
 
85년, 두루마리가 완성되어 공동체에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요한이 직접 읽어주었다. 사람들은 들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탄성이 나왔다.
 
“그래, 맞아.”
 
처음 들어보는 새로운 가르침에 대한 동의가 아니었다. 자기가 살아온 것을 언어로 확인한 사람의 탄성이었다. 요한이 15년간 그들과 함께 산 것이 두루마리 안에 들어 있었다. 그들은 문자를 읽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다시 만난 것이었다.
 
날이 밝도록 썼다.
 
 


 

5 : 밧모섬소망의 현현(顯現)

 
황제의 칙령이 내려졌다. 요한은 밧모섬으로 유배되었다.
 
제자들이 눈물로 배웅했다. 요한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예루살렘을 떠날 때도, 마리아를 묻을 때도, 그는 앞을 보았다. 이번에도 그랬다.
 
섬은 작고 거칠었다. 바람이 쉬지 않았다. 요한은 바위 위에 앉아 에게해를 바라보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광야였다.
 
주님이 침례를 받으시고 혼자 광야로 가셨던 것이 이제 요한에게 왔다. 성령에 이끌리는 것은 반드시 편안한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바람 부는 섬이었다. '너는 나를 따르라' — 그 말씀은 좋은 곳으로의 초대가 아니라 주님이 가신 곳으로의 동행이었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어 — 요한은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
 
요한은 돌아보았다. 그리고 쓰러졌다.
 
주님이 거기 계셨다. 갈릴리의 그분이었으나 이제는 온 우주의 근본 원리가 인격화된 실체로 서 계셨다. 눈은 불꽃 같았고,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았다. 그것은 단순한 형상이 아니었다. 모든 거짓된 것이 타버리고 본질만 남는 — 그러나 소스는 자기 안에 있는, 자정(自淨)의 불꽃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 너머였다. 스스로 정화하려는 모든 노력이 그 앞에서 재가 되는 불꽃이었다.
 
주님은 일곱 교회에 대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그것은 외부의 비판이 아니었다. 머리 되신 분이 몸의 각 지점으로 보내는 실시간 진단이었다.
 
에베소 — 교리는 완전하나 처음 사랑을 잃었다.
 
요한은 받아 적으면서 알았다. 처음 사랑을 잃은 것은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었다. 생명이라는 전력 공급원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킨 것이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처럼 — 웅장하지만 차가운.
 
라오디게아 — 풍요 속에서 미지근해졌다.
 
하나님의 소스로부터 단절된 채 자가 발전하는 풍요. 그것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보여주는 지표였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새 예루살렘을 보았다.
 
성전이 없는 도성이었다. 율법의 돌판이 없는 도성이었다. 아르테미스 신전 같은 거대한 석조 건물도 없는 도성이었다.
 
어린 양과 하나님이 성전이심이라.
 
성전이 없는 도성 — 그것은 도성 전체가 성전이라는 뜻이었다. 모든 존재가 하나님이라는 거대한 코이노니아 안으로 직접 접속되어 있었다. 죄의 카테고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죄란 생명으로부터의 단절인데, 그곳에는 단절 자체가 불가능할 만큼 강력한 생명의 흐름이 영원히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오래 울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불탔을 때 흘리지 못했던 것이 이제 왔다. 처음부터 실체는 건물이 아니라 이 끊임없는 생명의 연결이었다는 것. 하늘의 소스 코드가 요한의 몸을 통해 지상의 언어로 변환되고 있었다.
 
주님은 일곱 교회에 대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그것은 외부의 비판이 아니었다. 머리 되신 분이 몸의 각 지점으로 보내는 실시간 신호였다. 요한은 받아 적으면서 하나씩 알아갔다. 각 교회가 어디 있는지를. 그리고 각 교회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에베소 — 처음 사랑을 잃었다. 교리는 완전하고 거짓 사도를 가려내는 분별력도 있다. 그런데 그 분별력이 차가워졌다. 진리를 수호하는 열심이 남았지만 그 안에 사랑이 빠졌다. 주님은 안에 계신다. 그러나 그 관계가 식어가고 있다.
 
서머나 — 가난하고 핍박받는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네가 부요하다고. 고난 안에서 오히려 살아있는 공동체. 주님이 그 고난 속에 함께 계신다. 고통이 죽이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서머나는 몸으로 알고 있었다.
 
버가모 — 사탄의 위좌 앞에서도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 그러나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을 용납했다. 세상과의 타협이 스며들었다. 주님은 안에 계시지만 그 안에 이물질이 들어왔다.
 
두아디라 — 사랑과 믿음과 섬김이 있고 나중 행위가 처음보다 많다. 성장하는 공동체. 그러나 이세벨을 용납했다. 거짓 예언이 내부에서 자라고 있었다. 주님은 안에 계시지만 그 생명이 오염되고 있었다.
 
사데 —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죽었다. 형식은 남아있지만 생명이 빠졌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안에서 말씀하신다.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 명이 있다고. 완전히 꺼진 것이 아니었다. 불씨가 남아있었다.
 
빌라델비아 — 작은 능력밖에 없지만 말씀을 지키고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 주님이 열린 문을 주셨다.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문. 연약함 안에서 오히려 온전히 주님께 붙어있는 공동체였다.
 
여섯 교회가 이러했다. 문제가 있어도, 식어가도, 오염되어도 — 주님은 안에서 말씀하셨다. 내주하심 안에서의 역기능이었다. 관계가 끊어진 것이 아니었다. 머리가 몸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에 이르렀을 때 요한은 멈추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요한은 그 말씀을 받아 적으면서 울었다. 다른 여섯 교회는 달랐다. 식어가도, 오염되어도, 형식만 남아도 — 주님이 안에서 말씀하셨다. 내주하심 안에서의 역기능이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는 달랐다. 주님이 밖에 계셨다. 내주하심 자체가 없는 상태. 그것은 여섯 교회의 문제와 차원이 달랐다. 관계의 약화가 아니라 — 관계의 부재였다. 심판 앞에 서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 그들이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면서. 자정(自淨)의 열심으로, 자족(自足)의 번영으로, 스스로 세운 것들로 가득 찬 채로 — 텅 빈 집 안에서. 설명서 없이 영으로 사는 것의 피로가 극에 달하면 사람은 라오디게아가 된다. 보이는 것들로 채우고 그것을 부요함이라 부른다. 그리고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요한은 바울의 잃어버린 편지를 떠올렸다. 바울이 라오디게아에 썼다고 했던 그 편지. 골로새의 형제들에게 돌려 읽으라 했을 만큼 중요하게 여겼던 편지. 그런데 그 편지가 없었다. 바울이 말하려 했던 것을 라오디게아가 받지 않으려 했던 것인지 — 요한은 파고들지 않았다. 다만 이것만 알았다.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때를 기다린다. 바울이 하려 했던 말을 — 이제 주님이 직접 하고 계셨다. 문 밖에서.
 
그리고 환상이 열렸다. 인, 나팔, 대접. 자정(自淨)의 짐승이 세상을 달렸다. 그분의 이름을 달고. 자족(自足)의 음녀가 그 위에서 화려했다. 그분의 은혜를 토핑 삼아. 그것이 더 무서웠다. 완전한 부재가 아니라 — 그분의 소스를 세상의 것 위에 얹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것. 그 유혹은 세상 밖이 아니라 에클레시아 안에서 더 조용히, 더 깊이 자랐다. 에베소가 그랬고, 라오디게아가 그랬다. 그리고 짐승은 결국 음녀를 삼켰다. 토핑으로 쌓아올린 것들의 끝은 언제나 서로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세상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보다 더 깊은 흔들림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 새 예루살렘이 보였다.
 
성전이 없는 도성이었다. 아르테미스 신전 같은 거대한 기둥도, 황제의 궁도, 라오디게아식 번영도 없었다. 그런데 어린 양이 성전이었다. 하나님이 성전이었다. 모든 것의 소스가 직접 임재하시는 도성. 설명서가 필요 없는 곳. 오로지 주님만 스승인 삶이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곳. 문 밖에 계셨던 분이 — 이제 도성 전체로 충만하셨다.
 
요한은 그제야 알았다. 이것이 소망의 현현(顯現)이었다. 끝이 보였다. 그 끝은 심판이 아니었다. 완성이었다. 지금 맨땅을 걷는 삶, 설명서 없이 주님만 붙잡고 사는 이 연약한 삶이 — 바로 이 도성을 향해 가고 있었다. 틀리지 않았다. 씨앗이 완성된 형태를 보고 있었다.
 
두루마리가 완성되었을 때 요한은 오래 앉아 있었다. 밧모의 바람이 여전히 불었다. 이 두루마리는 에베소로 갈 것이었다. 폴리카르포스가 받을 것이고, 일곱 교회로 돌아다닐 것이었다. 라오디게아에도 갈 것이었다. 바울의 편지가 사라진 그 도시에 — 이번에는 주님이 직접 쓰신 편지가 도착할 것이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것이었다.
 


 

6 : 귀환

 
요한이 에베소로 돌아왔을 때, 그는 거의 말이 없었다.
 
제자들이 둘러앉아 기다렸다. 폴리카르포스와 파피아스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달랐다. 폴리카르포스는 선생의 말씀을 그대로 보존하려는 사람이었고, 파피아스는 그 말씀이 지금 이 땅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묻는 사람이었다. 요한은 그 두 사람을 보며 생각했다. 둘 다 필요하다. 그러나 둘 중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요한은 한참 동안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린아이들아, 서로 사랑하라."
 
그것이 전부였다. 폴리카르포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밧모섬에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끝과 처음을 보았다. 그런데 그것은 같은 것이었다."
 
파피아스가 물었다.
 
"어떻게 그 생명을 살 수 있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르라.' 그것이 전부다. 따름이 교리보다 먼저다. 생명은 정착하지 않는다. 흐른다. 날마다 하나님의 소스로부터 새로 컴파일되는 것이다. 실로의 성막처럼 한 곳에 정착하려 하면 — 흐름이 멈춘다."
 
폴리카르포스가 다시 물었다.
 
"바울 선생님의 가르침은 어떻게 됩니까."
 
요한이 미소를 지었다.
 
"바울은 입구를 열었소. 위대한 일이었소. 그런데 우리는 이제 그 안에서 살아야 하오. 바울이 목숨 걸고 건너온 다리를 거주지로 삼으면 안 되오."
 


에필로그 : 요한 이후요한복음 21

 
요한이 눈을 감은 후, 제자들이 모였다.
 
그들 앞에는 요한이 남긴 두루마리들이 있었다. 복음서, 세 편의 편지, 밧모에서 받아 적은 환상의 기록.
 
폴리카르포스가 말했다.
 
"우리가 이것을 살아보았다. 증언해야 한다."
 
그들은 오래 이야기했다. 선생이 말씀하신 것들을 살아보니 어떠했는지. 결론은 하나였다.
 
믿음이 의가 아니었다. 영생이 의였다. 옳음은 선언된 지위가 아니라 — 생명 안에 있는 것, 흐름 안에 있는 것이었다. 죄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 그 생명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이었다.
 
마침내 파피아스가 양피지를 펼쳤다. 그들은 복음서의 마지막 장을 추인으로 덧붙이기로 했다.
 
논증이 아니었다. 기억이었다.
 
갈릴리 호숫가의 아침. 숯불. 생선 굽는 냄새. 그리고 주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시던 그 장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었다. 세 번 모두. 베드로는 세 번 대답했고, 세 번 부탁을 받았다. 그리고 베드로가 요한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주님이 대답하셨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파피아스가 붓을 내려놓았다. 눈이 젖어 있었다.
 
이것이 선생이 마지막까지 말씀하신 것이었다. 에베소에서도, 밧모에서도, 귀환 후에도 — 결국 이 한 마디 안에 모든 것이 있었다.
 
교리가 아니라 방향. 정착이 아니라 따름. 선언이 아니라 생명.
 
그 생명은 실로의 성막이 아니었다. 완성된 신학 체계도 아니었다. '너는 나를 따르라'에서 시작하여 — 날마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새로 컴파일되는 것이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그리고 그 부대는 — 영원히 새로웠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