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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썰미 , 귀썰미 , "귀 있는 자"

콜미리형제 2026. 2. 19. 15:12

눈썰미 = 귀썰미 = "귀 있는 자"

— 이미 열려있는 문을 알아보는 삶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계시록 2:7


들어가며 — 눈썰미라는 한국적 감각

한국인에게는 독보적인 "눈썰미가 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한 번 보고 몸이 기억하는 것.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는 것.

분석이 아니라 흐름을 읽는 것.

그런데 이 눈썰미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은 귀썰미이기도 합니다.

장인이 나무를 두드려보고 소리를 듣는 것처럼

— 보이는 것 너머의 결을 듣는 감각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오래전부터 말해왔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마태복음 11:15

예수님이 이 말씀을 반복하실 때마다,

그것은 단순히 청각을 가진 자를 향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생명이 살아있어 흐름을 감지할 수 있는 자를 향한 초대였습니다.


1. 눈썰미 = 귀썰미 — 같은 감각의 두 이름

눈썰미 = 눈 + 썰미(슬기)
→ 보되 본질을 읽어내는 감각
→ 한 번 보고 흐름을 아는 것

귀썰미 = 귀 + 썰미
→ 듣되 말 너머를 듣는 감각
→ 침묵 속에서도 흐름을 감지하는 것

이 둘은 결국 하나입니다. 생명이 살아있는 자의 감각 — 분석 이전에 작동하는 직관.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마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 마가복음 4:9

 

여기서 귀는 해부학적 귀가 아닙니다.

토양이 씨앗을 받아들이듯, 말씀이 스며드는 내면의 열린 상태입니다.

눈썰미 있는 장인이 재료의 결을 받아들이듯이.


2.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알게 하시는 방식

야다(יָדַע) — 히브리어로 '앎'은 정보 수집이 아닙니다.

포도나무가 가지를 아는 것처럼, 생명이 생명을 감지하는 것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 요한복음 10:27

 

양이 목자의 음성을 분석해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익숙한 소리를 알아채는 것입니다.

이것이 눈썰미이고 귀썰미입니다.

하나님이 알게 하시는 통로는 대개 이렇습니다:

① 마음의 기울어짐 어떤 사람 앞에서 이유 없이 따뜻해지거나,

더 머물고 싶어지는 순간. 내가 만든 감정이 아닌, 흘러들어오는 감각.

눈썰미 포인트: 내가 애쓰지 않았는데 마음이 먼저 움직인 곳.

② 상대의 결핍이 보이는 순간 분석이 아니라 긍휼이 먼저 올라오는 사람.

이것은 내 심리학이 아니라, 아버지의 눈으로 잠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 마태복음 9:36

 

③ 준비하지 않은 말이 맞아떨어지는 순간 말하고 나서 내가 더 받은 느낌이 드는 대화.

통로가 된 것입니다.

④ 반복되는 우연 같은 사람과 자꾸 마주치거나, 같은 주제가 반복될 때.

우연이 세 번 이상이면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스케줄러가 작동하는 신호입니다.


3. 눈썰미의 전제 — 고요함

장인의 눈썰미는 바쁜 사람이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재료 앞에 고요히 앉는 사람이 가집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 시편 46:10

 

물이 흔들리면 바닥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움직이면 하나님의 흐름이 보이지 않습니다.


눈썰미가 죽는 자세:
→ 첫날부터 좋은 인상을 만들려 함
→ 내가 어떻게 보일까를 계산함
→ 빠르게 관계를 파악하려 함

눈썰미가 사는 자세:
→ 말보다 분위기를 먼저 읽음
→ 누가 외로운지 봄
→ 내 마음이 기울어지는 방향을 놓치지 않음
→ 서두르지 않음


4. 귀 있는 자 — 계시록의 반복

계시록 2-3장에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마다 같은 문장으로 끝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일곱 번 반복됩니다. 이것은 강조가 아니라 진단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일도 완벽하고 이단도 잘 걸러냈습니다.

그런데 귀를 잃었습니다. 처음 사랑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흐름을 감지하는 귀썰미가 없어진 것입니다.

조직은 효율적으로 돌아가는데

— 하나님이 빠진 상태. 이것이 가장 조용하고 위험한 죽음입니다.


5. 야다의 삶 — 이미 열려있는 문 안에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 계시록 3:20

 

문은 이미 두드려지고 있습니다.

내가 문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두드리시는 소리를 알아듣는 것입니다.

야다는 내가 시작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이 먼저 존재하고, 성령이 우리를 그 사귐 안으로 이끄십니다.

우리는 참여자로 초대받습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 요한일서 1:3

 

관계를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열려있는 사귐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문을 알아보는 감각

— 그것이 눈썰미이고 귀썰미이며, 성경이 말하는 **"귀 있는 자"**입니다.


6. 실로의 성막, 디베랴의 숯불 — 이가봇

사무엘상 4장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여 묻습니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우리를 패하게 하셨는가." 그리고 곧 답을 냅니다.

실로에서 언약궤를 가져오면 된다고.

궤가 진영에 들어오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땅이 울릴 정도였습니다.

모임은 뜨거웠고 형식은 완벽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불렸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보병 삼만 명이 죽고, 언약궤는 빼앗겼으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그날 죽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엘리는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그날 죽어가며 아이를 낳았습니다.

산파가 "아들을 낳았다"고 알렸지만 그녀는 대답도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지으며 말했습니다.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 사무엘상 4:21

실로의 성막은 그 후에도 존재했습니다.

제사장들은 계속 직분을 수행했습니다.

시편 78편은 조용히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실로의 성막 곧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

모임은 남아있었지만 — 임재는 이미 떠난 뒤였습니다.

 

요한복음 21장 디베랴 호숫가에서 제자들은 밤새 그물을 던졌습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

그들이 미처 알아보지 못한 사이에

— 해변에 숯불이 이미 피워져 있었고 생선이 그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준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귀썰미 있는 자는 그 숯불 앞에서 냄새를 맡습니다.

아니, 냄새가 그를 찾아옵니다.

설명할 수 없는데 영이 먼저 압니다.

7절입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주님이시라."

분석한 것이 아닙니다.

계산한 것이 아닙니다.

영이 먼저 알아챈 것입니다.

 

실로의 성막은 언약궤를 가져오면 된다고 계산했습니다.

디베랴 호숫가의 그 제자는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냄새가 먼저 왔고,

영이 먼저 알았습니다.

이것이 실로의 성막과 디베랴 호숫가의 차이입니다.

마치며

한국의 장인은 제자를 볼 때 이렇게 말합니다.

"저 아이는 눈썰미가 있어."

하나님을 이런 눈으로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흐름을 읽는 자.

고요히 앉아 재료의 결을 듣는 자.

이미 두드리고 계신 소리를 알아채는 자

— 그것은 내가 만든 감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열어주신 감각입니다.

 

매일 아침,

그 고요함은 내가 만드는 침묵이 아닙니다.

간밤에 하나님이 이미 일하시고 준비하신 것을

— 거듭난 생명이 감지할 수 있도록, 혼과 몸이 잠시 대기하는 시간입니다.

문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열어두신 것 앞에 서는 것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 요 10:27,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계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