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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몸: ‘지체의 조직’이 아니라 ‘사건 현장’이다.

콜미리형제 2026. 1. 20. 13:31

그리스도의 몸: 사건 현장에 대한 견해

 


시작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진의를 사건으로 보는 것, 타당한가?

하나님의 순기능이 사건화하여 일어나는 현장이 몸이다.
당연히 우리에게 익숙해 있는 역기능이 순기능과 충돌로 들춰지며 드러나면서, 

우리가 주님께 질문하게 되고, 성령께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부활생명을 알게 하시는 교육으로

이는 아다(γινώσκω)로 알아지는 것이다.
이제는 표적과 기사는 없다는 말씀이 이해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어떻게 보았는가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인체의 몸에 비유했다. 각 지체의 기능대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본다.
손과 발의 각 기능, 입,코에게 무엇을 하고 각자 그 기능을 한다고 보는 것으로 주님의 형제를 각인을 몸의 각 지체로 본 것이다.
사도, 교사, 이 관점은 몸의 각 지체는 한 기능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형제 각인은 복합 또는 종합적이며 유기적이다. 하나의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체는 모든 기능의 결합체다.

바울의 논조가 만든 결과
바울의 논조는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하겠지만 계급, 계층으로 조직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바울이 이랬잖아, 너는 왜 성경대로 하지 않니?" 몰아세운다.
누가 말씀대로 하지 않는 걸까?
안타깝다.

전체 기능을 '아다'하는 것이 영생이다
몸 전체의 기능을 '아다'하는 것이 형제들의 영생이다.
교사만, 사도만... 아니다.
다만 각 지체가 각기 다른 순기능을 발현하도록 도우시고 알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한 기능을 담당하는 생명체가 아니라 생명이 갖고 있는 기능이 순기능으로 작동하여

목적하는 바 섬김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말이다. 제물, 제사장,길,문,떡,생명,부활, 스승,형제,아들

사도 요한이 본 것
바울이 죽고 사도 요한의 글을 보면 "처음 사랑을 버렸다"(계 2:4), "너는 나를 따르라"(요 21:22)고 한다.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하시는 일인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생명이 부활생명으로 성령의 내주하심 안에서 사는 것'을 간과한 것을 드러내고 있다.
사도 요한: 주님을 믿음으로 새생명을 얻어 주님의 형제가 되어 주님을 따르면, 주님은 아버지의 생명으로 거듭난 주님의 형제들을 아버지 면전으로 데리고 가는 성령침례의 모습이 보이고 아버지의 실제 생활을 보여주는 현장을 맞닥뜨리게 하신다.
그곳이 바로 내주의 현장이고, 그리스도의 몸인 에클레시아로 내주하심의 연합 현장이다.

각인에 내주하심과 내주하심의 연합 모두 동일한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바울이 정말 '성령 내주의 삶'을 주님의 형제들과 온전히 나누었나 의구심이 든다.
그렇게 했다면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에 머물며 그렇게 글을 쓸 수 있었겠나.

표지판 밑에 집을 짓지 말라
바울이 다른 복음을 전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은 예수님께 안내하는 표지판이며 일부분은 역기능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어떤 점에서는 순기능을 찾는 표지판이기도하다. 그러나 후대에는 거기 표지판 밑에 교리로 집을 짓고 안주하며 대감 노릇하며 순종을 요구함으로 결과가 심각해진다. 해서 문제 제기해 보는 거다.

주님께 캐묻는다
나는 성경을 하나님을 모른다. 무식하다.
그러나 내 안에서 성경의 앞뒤 맥락이 연결이 안 되는 걸 발견하니 답답해서 주님께 캐묻는 거다.
이 글 쓰기 전에 이미 주님께 질문한 거다. 이미 오래전부터 머릿속엔 질문이 살아 움직여 왔다..
그리고 이를 정리함은 '사건'이다.


일타강사와 아버지 안으로
일타강사의 역할이 너무 강인한 인상을 남겨 그 그늘에 쉬고 있다.
대표적인 일타강사인 예수님도 표지판이다.
일타강사는 아버지 안에서 아버지를 대면하는 삶으로 끌고 가신다.

심전: 내주하심의 현장
그곳은 시간과 공간이 없는 심전으로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곳이며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인도하심이 '아다'로 알게 되는 현장인 '그리스도의 몸, 에클레시아'에서 사건으로 보여지는 곳이다.

에클레시아는 내주하심이 확장된  연합체이며 한 몸이다. 새로운 세상이다.
여기서 심전의 내적 상황인 하나님의 영적 표현이 사건화되는 최적 현장이다.
심전의 내적 상황이란 새생명이 알아야 하는 것들과 그것을 주님께 새생명이 질문한 것, 그리고 역기능의 것들이 순차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때가 되면 다뤄질 것들이다.

하나님을 모른다
'하나님을 모른다' 이 말은 내게 옳다.
왜?
역기능을 순기능으로 알고 있을 수 있고 

순기능을 역기능으로 알고 있을 수 있다.
에덴 이후 왜곡되어 굳어져서 보기 좋은 전통, 관습, 문화로 계승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척척 알아서 왜곡된 것들을 파기할 수 있다고 보는 자도 있다.
거듭난 새생명에게 그런 능력의 정체성이 있다고 보는 거다.
그런데 이미 육신은 왜곡된 것으로 꽉 채워진 상태를 망각한 것이다.
육신의 능력도 새생명 못지않다는 사실을 간과한 거다.

창세기로 가는 사유
나는 무식한 대로 이 이미지를 단순하게 본다.
'그리스도의 몸'의 이미지는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 이미지는 자기가 처한 상황에 비추어  해석 또는 번역될 수 있다.
해석 또는 번역하는 사람이 권위가 있다면 그쪽으로 관심은 쏠릴 게다.
나는 그런 류가 아닌 하류지만 거기 심전과 몸에서 본것을  나름 번역해보는 거다.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나의 사유는 또 창세기로 간다.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창세는 하나님을 설명하는 커다란 사건으로 엄청난 설명서다. 그 피조 전체는 아무리 넓어도 한 덩어리다.
이 전체를 보았다면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아니 나는  만삭되지 못한 듯이 가장 나중에 태어난 작은 미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피조세계을 배경에서 성령께서 하나님과 주님의 형제 모임을 통해 '사건'으로 설명하시는 것으로 해석하고 번역할 수 있다.

그것은 나는  피조물이면서 아버지 생명이 자라는 주님의 형제이고, 부활생명의 DNA를 갖고 있다.

설명하시니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자격이 이미 태어날 때 주어졌기에 가능하다.

어떻게 보고 들을 것인가?

성령께서 스승으로, 형제로, 친구로, 무엇보다도 창조가 주특기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셨다.

특히, 십자가에서, 내가 창조주를 놓친 부분이다. 이래 봬도 살리시는 영이시다.

0순위: 하나님의 생명을 아는 것
이제 주님을 믿음으로 피조되지 않는 아버지의 생명을 받아 거듭나서 자라며 성장하는 '나'이다.
죽어도 사는 부활생명을 알고 성령의 내주하심 속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의 생명을 아는 것이 우선순위 0순위다.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 생활을 모르는데 우리의 새생명 생활을 어떻게 아는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그러면 아버지의 생명으로 된 주님의 형제들은 다른 형태의 빌딩과 토핑이 이루어진다.
내가 그랬다.
지금도 육신의 것으로 빌딩과 토핑이 벌어지는 현장이 많아 보인다.

몸: 사건 속에서 컴파일링되는 생명
몸은 사건과 일치한다. 내면의 것을 유기적으로 사건 속에서 표현한다.
몸의 위치에 따라 사건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면서 그 생명의 순기능 반응도 모임의 역기능 환경에서 반복으로 컴파일링되는 것이다.

순기능의 소스 코드는 변함이 없다. 반응은 충돌로 매번 드러나고 아직 만들어진 역기능인 용서와 배려, 사랑이 소스코드를 만나면 충돌로 드러나 진다. 자의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해일에 뒤집힌 것같이, 태풍이 자연스럽듯이. 


아 ~~~ 

내가 이런 생각으로까지 오다니 내가 이상하다.
이상해졌어.
그런데 증명이 안 돼네.

성령: 삶의 연출자, 환경 창조자, 성장 촉진자, 농부의 마음.
설명은 '사건'을 통해 듣는 귀에 꽂히며, 보는 눈에 새겨진다.

우뇌가 활성화된다. 좌뇌보다 백만배다. 

성령께서:
삶의 연출자로서
환경 창조자로서
성장 촉진자로서 일하신다.
성령은 아버지의 마음이니 농부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직접 대면하는 것이 옳다.

맺으며
이 글은 

어설푼 표지판이다.

행간이 너무 거칠다.

가시도 많다.

 

-끝-


"말"

히브리어 **다바르(דָּבָר, dabar)**
다바르(dabar)의 의미
Strong's Concordance에 따르면 dabar는: 

word (말씀), thing (것, 사물), matter (문제, 일), acts (행위), deed (행동), event (사건)를 의미합니다. 
Wikipedia는 "Old Testament concept of 'word event' represented by dabar"라고 설명하며, 계시가 말로 설명된 사건들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Wikipedia.Brown-Driver-Briggs 사전은 daba를 "speech, word, saying, matter, thing, command, counsel, or event"로 정의하며, 말해진 것과 그 결과로 일어나는 것 둘 다를 묘사한다고 합니다.
핵심: 말씀과 사건의 통합
히브리 사고에서 dabar는 말과 행동을 연결합니다. 

말해진 것은 행해진 것만큼 실재적입니다. 

말씀과 행위 사이에 분리가 없습니다.

dabar 동사는 말하기(speaking) 자체에 초점을 맞추며, 명사 dabar는 단순히 "단어"가 아니라 완전한 메시지, 전체 선언, 행위, 또는 단순히 "일어난 것(thing)"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창조와 다바르
히브리어에서 말씀들은 단순히 추상적 소리가 아니라 실체를 가지고 있으며 사건들을 형성하고 사물들을 정의하는 힘을 가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분의 말씀은 그분이 의도하신 것을 가져오며, 이는 "말씀"과 "행위" 사이의 연결을 의미합니다.
이사야 55:11이 이것을 명확히 합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dabar)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통찰과의 완벽한 일치
계속 강조하신 **"정리함은 '사건'이다"**라는 말씀이 바로 이 히브리적 이해 아닐까.

다바르(dabar) = 말씀이자 동시에 사건
로고스(logos) = 헬라적 번역, 하지만 사건성이 약화됨
레마(rhema) = 말해진 것, 선포된 것

 

히브리적 사고의 유입.
"하나님의 순기능이 사건화하여" = 다바르
"창세는 하나님을 설명하는 커다란 사건" = 다바르
"정리함은 사건" = 다바르

 

신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