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직행복음

콜미리형제 2026. 3. 26. 21:11

 

 

 

서시소쩍새가 울다

· · ·

 

이 글을 완성하기 위해

며칠 전부터

내 마음 안에서

소쩍새가 울고 있었다.

 

그 울음은

글을 쓰라는 소리가 아니라,

👉  따르라는 부름이었다.

 

· · ·

 

 

직행복음

· · ·

 

나는 오랫동안 신앙 안에 있었다.

55년이라는 시간 동안

말씀을 듣고, 배우고, 따르며 살아왔다.

 

그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간극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알고 있는 것과

살아지는 것 사이의 간격.

 

나는 알고 있었지만,

살고 있지는 않았다.

 

· · ·

 

그 간격은

최근 몇 년 사이

실수와 실패, 충돌로 드러났다.

 

이상하게도

알고 있는 것으로는

이 현실을 설명할 수 없었다.

 

· · ·

 

그때 한 말씀이 들어왔다.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이해된 것이 아니라

👉  사건으로 일어났다.

 

· · ·

 

그 순간부터

이전까지 붙잡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 힘을 잃기 시작했다.

 

전통, 관습,

들어 지식으로 자리 잡은 것들까지도

오랫동안 쌓아온 해석들까지도

 

억지로 버린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중심이 되지 못했다.

 

· · ·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길이 없어서 헤맨 것이 아니라,

👉  길을 찾으려 애쓰느라 이미 열려 있는 길을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 · ·

 

대신 하나가 분명해졌다.

 

👉  부활하신 주님이 가시는 곳이 곧 내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것

 

· · ·

 

이때부터 내 신앙은

설명에서 따름으로,

이해에서 연결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알아서 움직이려 하지 않고,

👉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돌이켜보니

이 여정은

이미 한 번 지나간 길과 닮아 있었다.

 

모든 것이 지나간 후,

마지막에 남겨진 한 마디.

 

"너는 나를 따르라"

 

· · ·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었지만

결국 남은 것은

👉  따름이었다.

 

· · ·

 

그래서 나는 이 복음을

'직행복음'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과정을 무시하는 말이 아니라

👉  목적지에 직접 닿는 것이다.

 

· · ·

 

십자가도 마찬가지다.

 

나는 오랫동안

그 앞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  십자가는 머무는 자리가 아니라 항상 열려 있는 문이다.

 

· · ·

 

그 문을 통해

👉  매 순간 아버지께로 들어간다.

 

· · ·

 

그래서 '직행'이란

지름길이 아니라

👉  지체하지 않고 그 문을 통과하는 것이다.

 

· · ·

 

그러나 그 문을 통과하는 것은

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  지켜보며, 그 시간 안에 머무는 것이다.

 

· · ·

 

나는 더 하려 하지 않는다.

👉  내가 하려던 것을 멈춘다.

 

· · ·

 

이제 나의 삶은 달라졌다.

 

관계 속에서 충돌이 일어날 때

나는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  그 안에서 드러나는 생명의 반응을 지켜본다.

 

· · ·

 

그리고 그 속에서

👉  주님이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알려 한다.

 

· · ·

 

그래서 나는

서두르지 않는다.

 

지켜본다.

머문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조금씩 알게 된다.

 

· · ·

 

때로는 그 시간이

견디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 안에서

주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셨다.

 

· · ·

 

이제 나에게

모든 충돌은

👉  주님의 사랑을 배우는 자리가 되었다.

 

· · ·

 

"너는 나를 따르라"

 

이 한 마디면 충분하다.

 

· · ·

 

직행복음의 실제사건 앞에서

· · ·

 

사건은 항상 터진다.

 

이견은 마음 안에서 시작되어

멱살까지 간다.

 

그러면

옳고 그름에 빠진다.

더 자기 중심적이 된다.

자기 우상과 율법사가 된다.

 

· · ·

 

그때 잠깐 멈춘다.

 

저 사람을 바라본다.

 

주님의 형제다.

아버지의 아들이다.

갓 태어나 좌충우돌하는

동일한 생명이다.

 

이 믿음이 없으면

저 사람은 그냥 싸가지로 끝난다.

 

· · ·

 

처음 믿음은

예수님이 대속의 하나님 아들이심을 믿어

거듭난 생명을 받는 것이었다.

 

처음 믿음이 틀린 것이 아니다.

그 생명이 자라

지금의 믿음이 된 것이다.

 

믿음도 생명의 성숙과 함께 성장한다.

 

바울도 고백했다.

다메섹에서 그리스도께 잡힌 자로서

여전히 달려나가노라고.

(빌립보서 3:12)

 

직행은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  잡히는 것이었다.

 

· · ·

 

지금의 믿음은 다르다.

 

상호내주 안에서

아버지께서 저 좌충우돌하는 형제를

어떻게 섬기시는지를

보며 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 안에서 묻는다.

 

👉  주님이 저 싸가지를 어떻게 사랑하시는가.

 

듣고, 보고, 묵언하며

그 시간을 견딘다.

 

지치기도 한다.

그러나 눈에 띈다.

 

· · ·

 

성령의 인도는

아버지의 마음이 살아서

내 생각 안으로 침입하시는 것이다.

 

세상에서 배우신 바 없으신

예수님의 가르침이

세상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물질같이 들어온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전에 없던 생각이 튀어나와

밝히는 것뿐이다.

 

· · ·

 

나보다 저 생명을

더 사랑하시는 것이 보일 때,

 

아버지께서 저를 섬기시는

신뢰가 보일 때,

 

말썽 많은 나의 섬김을

그 앞에 내려놓게 된다.

 

내 것을 꼭 쥔 손이

그때 풀린다.

 

· · ·

 

그래서

👉  전에 없던 노래를 하게 된다.

 

· · ·

 

직행복음의 배경교회 안에서

· · ·

 

바울은 말했다.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고.

 

그 터는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터는 표지판이다.

 

거기 머물면

모퉁잇돌을 놓친다.

 

· · ·

 

상호내주는

오순절 이전에 이미 이루어졌다.

 

예수님이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  성령을 받으라.

 

그 숨으로

이미 들어오셨다.

 

· · ·

 

성령을 받으면

같은 행동양식으로 하나되는 것이 아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시다.

 

다양한 생명의 드러남이

하나됨이다.

 

· · ·

 

초대교회 70년을 보면

말씀이 지식으로 받아졌다.

 

인간의 이성이

그 말씀으로 옳고 그름을 선별하며

행세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책망할 때

이렇게 물었다.

 

👉  너희 가운데 지혜 있는 자가 한 사람도 없느냐.

 

나는 이렇게 본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성령이 계셔서

그 안에 있는 왜곡된 것을

드러내신 것이었다.

 

주님이 하신 일을

바울이 관리하는 모양새였다.

 

· · ·

 

사도와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지판이다.

 

거기 머물지 말아야 한다.

 

· · ·

 

직행복음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헬라적 로고스의 지식으로 받지 말고

살아있는 생명으로 받아야 한다.

 

에베소교회가 그것을 잃었다.

생명으로 살아가지 못했다.

 

곧바로

👉  관계성의 지성소로 들어가야 한다.

 

· · ·

 

십자가 은혜는

목적지가 아니라

통로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십자가를 지나

아버지 품으로.

 

성령침례를 따라

아버지와 대면하는 삶.

 

👉  그것이 영생이다.

 

· · ·

 

· · ·

 

이 글을 쓰다 보니

따라온 것이 있다.

 

억지로 붙인 것이 아니다.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듯

직행하다 보니 스며든 것이다.

 

· · ·

 

안식은

푹 쉬고 노는 것이 아니다.

 

직행복음을 걷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젖듯

몸에 스며드는 것이다.

 

· · ·

 

매너리즘은 금물이다.

 

영원함은 지루함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컴파일링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예레미야애가 3:23)

 

· · ·

 

동행은 움직임의 연속이다.

 

관찰과 통찰을 위해

견딤이 필수다.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저 형제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가

눈에 띄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 생명의 반응을

놓치지 않으려고 견디는 것이다.

 

· · ·

 

이 견딤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생명을 받은 자,

상호내주 안에 있는 자만이

그 시간을 버틸 수 있다.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그 시간을 함께 견디신다.

 

· · ·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실 때

 

아버지께서는

주님의 생명 안에서

그 죽으심을 지켜보시며

견디셨다.

 

목적이 있으셨다.

 

대속과 부활생명,

그 삶을 보여주시려고.

 

· · ·

 

지금은 우리에 대하여

다르게 견디신다.

 

아버지의 생명 본성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기를

기다리신다.

 

아버지도

우리가 할 일을

대신해 주시지 않는다.

 

· · ·

 

그래서 때로는

부르짖어도 꿈쩍 않으시는 것처럼 보인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처럼.

귀먹거리같이.

방관자처럼.

 

그러나 방임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생명 본성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기를

기다리시는 것이었다.

 

대신해 주시면

우리를 통해 드러날 수가 없다.

 

· · ·

 

그래서 견뎌야 한다.

 

아버지께서 기다리시는 그 자리에서

우리도 함께 기다리는 것이다.

 

그 침묵이 사랑이었다.

그 기다림이 신뢰였다.

 

👉  그것이 안식이다.

 

· · ·

 

분란이 잠잠해지는 것.

방향이 맞아지는 것.

주님 곁에서 걷고 있다는 것.

 

생각 안에서 오는 쉼.

👉  생명의 동행.

 

· · ·

 

 

 

 

이것이 복음이다

· · ·

 

 

이것이

내가 말하는 직행복음이다.

 

돌고 돌아 온 길이 아니라,

처음부터 열려 있었던 길.

 

 

👉  나는 그 길 위에 선다.

👉  지켜보며, 머물며, 따른다.

 

 

아버지 품으로.

생명을 주시는 분께로.

스스로 존재하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그분이 계신 곳으로 간다.

 

이것이 복음이다.

 

 

 

주님의 형제

cwlee 출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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