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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누가 살고 있습니까?”

콜미리형제 2025. 12. 29. 07:11

 

“여기, 누가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자’인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자’인가

이 질문은 선택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미 어느 쪽으로 살고 있는지를 드러낼 뿐이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자’는
하나님을 목적에 두고 산다.
그 목적은 선하고, 거룩하고, 헌신적이다.
그러나 중심에는 언제나 나의 의지, 나의 판단, 나의 책임이 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묻는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어디로 가야 합니까?”
“얼마나 더 헌신해야 합니까?”

이 질문들은 모두 옳다.
그러나 이 질문들만으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은 항상 바깥에 계신다.

반면 ‘하나님이 거하시는 자’는
다르게 묻는다.
아니, 거의 묻지 않는다.

이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할지가 아니라
누가 지금 여기 계신가다.

그래서 이 삶에는
명확한 패턴이 없다.
일정도, 전략도, 보장도 없다.
있다 해도 그것들은
삶의 중심이 아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것을 따라
자기 존재가 반응할 뿐이다.

그래서 이 삶은
방임처럼 보이고,
무책임해 보이며,
위험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자’는
결과를 남긴다.
사역, 성과, 영향력, 구조.

‘하나님이 거하시는 자’는
결과를 남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거처를 남긴다.
그 사람 곁에 있을 때
설명할 수 없는 평안,
말로 가르칠 수 없는 방향이 생긴다.

이 차이는
열심의 차이가 아니다.
헌신의 차이도 아니다.

거처의 차이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자는
끝내 지치거나,
끝내 스스로를 세우거나,
끝내 다시 자기 자신을 Casting한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자는
오히려 점점 숨는다.
자기 이름을 지우고,
자기 확신을 낮추고,
다시 짐승과 음녀의 구조를 만들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작아진다.

그래서 이 질문은
도덕적 질문이 아니다.
사역 평가 질문도 아니다.

이 질문은
지금 내가 어디에 거처를 내어주고 있는가를 묻는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나 안에 거하고 계신가.

이 둘은
동시에 지속될 수 없다.

하나는
언젠가 반드시 나를 중심으로 돌아오고,
다른 하나는
나를 중심에서 내려오게 만든다.

그래서 이 질문은
바닥을 긁는다.

그리고 바닥을 긁은 사람만
다시 묻지 않게 된다.

>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이
명령이 아니라
거처의 확인으로 들릴 때,
이미 선택은 끝난 것이다.


사명과 숨음이 충돌할 때

— ‘땅끝까지’와 ‘너는 나를 따르라’ 사이에서 멈추다



포스팅을 하려다 멈췄다.
예수님의 말씀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너는 나를 따르라.”

하나는 사명으로 드러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 안에 숨는 삶이다.
그런데 이 두 모습이
지금 우리의 신앙 현실 속에서는
충돌하면서 동시에 중첩되어 보인다.

주님의 형제들이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다.
겉으로는 사명을 말하고,
속으로는 숨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삶의 무게중심은 늘
**돋보이는 사명 쪽으로 기울어지고,
가치는 거기에 더해진다.**

그래서 멈췄다.
이걸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사명과 숨음이 충돌할 때
이 두 말씀은
같은 자리에서 주어진 말씀이 아니다.

“땅끝까지”는
예수님의 **승천 직전 마지막 기록**이다.
반면
“너는 나를 따르라”는
**부활 이후, 처음으로 기록된 개인 호출**이다.

이 차이는 단순한 시간 차이가 아니다.
**존재 상태의 차이**다.



마태복음이 기록된 자리
마태복음은
초대교회를 열심히 살던 **유대 형제들이 이탈하던 상황** 속에서,
약 주후 60년경 기록되었다.
질문은 이것이었다.
* 예수를 믿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유대인인가?
* 이 길은 역사 속에서 유지 가능한가?
* 공동체는 어떻게 흩어지지 않고 지속되는가?
그래서 마태복음은
윤리, 실천, 공동체, 그리고 **지상명령**을 강하게 붙든다.
“가라”는 말은
개인의 내면 상태를 규정하려는 말이 아니라,
**흩어지는 공동체를 다시 역사 속으로 묶는 방향 선언**이다.

요한복음 21장이 등장한 이유
요한복음 21장은 다르다.
이 장은 “부활 장면 추가”가 아니다.
교회 생활을 실제로 해 보니
**어떤 역기능이 반복적으로 도출되더라**는
사후적 기록에 가깝다.
그 핵심 사건은 이것이다.
사도 요한이 죽지 않고
예수님 재림 때까지 살 것이라는 소문이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 사이에서 퍼졌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죽었다.**
그 순간 공동체는 충격을 받는다.
*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 우리는 무엇을 못 알아챈 것인가?
이 질문은
요한이 살아 있을 때는 제기되지 않았다.
**요한이 죽고 나서야** 터져 나왔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 지점에서
‘이 사람’이라는 표현이 문제로 떠오른다.
‘이 사람’은
사도 요한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요한복음 전체를 보면
이 표현은 **다른 용도**로도 계속 사용된다.
나는 조금 전까지
‘이 사람’을 **한 명의 개인**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요한복음 21장은
한 사람이 혼자 쓴 기록이 아니다.
**공동체가 이 기록을 추인했다.**
“우리가 안다”라는 문장은
분명히 단수의 증언을 넘어선다.
그래서 이렇게 보고 싶어진다.
‘이 사람’은
사도 요한 개인이 아니라,
요한과 함께했고,
요한의 죽음을 직접 목도했고,
그 증언을 이어받아 살아가야 했던
**살아 있는 공동체**,
곧 **교회**일 수 있다.
아닐 수도 있다.
내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 **사도 요한은 아니다.**
정정의 주체가
오해의 대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 소문을 몰랐을까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떠오른다.
사도 바울은
이 소문을 정말 못 들었을까?
바울의 편지에는
이 소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무지였을까?
아니면
언급할 가치가 없었던 것일까?
적어도 분명한 것은,
바울의 신학과 언어 구조 안에는
“누가 얼마나 오래 사느냐”는 질문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점이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이것이다.
>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아닌가.
그래서 이 침묵은
무지가 아니라 **거리두기**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다시 남는 질문
요한복음 21장은
사명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중심을 교정**한다.
우리는
삶의 방향을
삶의 결과로 바꿔 읽었다.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특별한 운명을 약속한 말이 아니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특정 인물의 결과로 해석했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은
마지막에 이렇게 묻는 것처럼 보인다.
> 우리는
> 주님의 방향을 따르고 있는가,
> 아니면
> 사명이라는 결과를 붙들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포스팅을 멈췄다.



기록을 남기며
이 글은
결론이 아니다.
주장이 아니다.
사명과 숨음이 충돌하는 자리에서
**멈춰 선 기록**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여전히 열려 있다.
>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 질문은
이제 과거 인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교회**를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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